달큰한 잠에 빠져있을 늦은 시각. 허나 사막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왕궁내부는 쇠파리 떼가 꼬이기라도 한 듯 비명과 고함이 뒤섞인 소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통이라는 한단어로 이 상황을 단번에 설명할 수 있다. 어쩌면 이로도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전의 조짐이 얼핏 나타나곤 있었으나 강대한 왕실 군에 맞설 힘을 키운 자들은 아직 누구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이리 소란스러운가. 다름 아닌 아리안트 왕실의 왕가와 귀족들의 사치스런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유지되어왔던 금고의 1/2이상이 도적 때도 아닌, 고작 단 한명에게 에누리 없이 탈탈 털렸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일로 이리도 소란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스케일이 큰 사건이었다.
찾았다! 저기 있다! 무기를 들고 정신없이 사방을 뛰어다니는 남자들 중 한명이 멀리로 나타난 이형의 그림자를 발견하곤 꽥 고함쳤다. 잡을 수도 없고 소리친다 해서 그곳에 있어줄 리 없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멈추라는 진부한 고함을 외치며 그림자가 나타난 쪽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는 위치기에 지켜보는 이가 더 서글퍼질 지경이다.
지위가 뭐고 신분이 뭐고 계급이 뭐라고. 위에서 하라면 아랫사람들은 할 수밖에 없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 군대 아니던가. 똥개훈련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병사들에게 허무하고 턱도 없는 뜀박질을 선물보따리처럼 안겨준 원흉은 자신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비웃듯 좌, 우, 위, 아래, 정신없이 왔다갔다 반복하며 혼란을 주고 있었다. 암만 봐도 저를 쫓아오는 병사들과 그들보고 빨리 잡지 못하겠냐고 닦달하는 자들을 놀리는 꼴이다. 왕궁의 금고를 거덜 내다시피 털어간 도둑답게 시건방지기 짝이 없다.
그 꼴사납고 우습고 같잖은 추격전이 얼마나 지속됐을까. 슬슬 지루함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잡았다는 고함을 외치며 달려드는 병사들을 바로 코앞에서 피해버리곤 순식간에 성벽위로 달아난 이의 모습은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만월의 푸른빛 아래 매끄러운 자태를 드러낸 칠흑의 가면이었다. 까마귀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그건 즐거운 비웃음을 짓고 있는 듯 했다. 뾰족한 부리 끝이 당장이라도 머리를 쪼아올 것처럼 예리하고도 우아한 곡선의 끝을 장식한다. 그에 사람들은 화등잔만하게 눈을 떴다. 괴, 괴도 레이븐! 저 가면을 알아챈 자들이 하나같이 그리 외쳤다.
―괴도 레이븐. 당대 최고의 신출귀몰한 괴도. 그가 지금껏 노린 것 중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아무리 철저한 대비와 보안을 갖추더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은 솜씨로 보물을 훔쳐내는 것에 성공해 내고 만다.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 백전백승의 괴도.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모르며, 언제나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녔기에 레이븐Raven이라 불렸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레이븐에 관련된 얘기는 깨끗하게 사라지게 됐다. 죽었다던가, 그동안 훔친 보물들로 인해 평생 놀고먹고 살아도 충분하니 괴도 짓을 때려 쳤다든가 기타 등등. 그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 수많은 가설과 추측이 난무했다. 허나 무성한 소문만 돌 뿐 확실한 진실은 알려지지 않은 채 그렇게 전설처럼 시간에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헌데 지금 이 순간, 그 전설의 괴도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양 옆으로 달려드는 병사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유유히 서 있는 이가 레이븐이라며 그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자들이 소리쳤다. 마른 벌판에 불씨가 번지듯 성벽 아래로 몰려있던 병사들 사이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최근 괴도 레이븐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곤 했으나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었던 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소문이 정말이었다니. 많은 이들이 탄성과 감탄 등의 의미 불명의 소리를 내지르며 새까맣고 윤이 나는 까마귀 가면을 멍청하게 올려다봤다. 언제나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만을 노려왔던 자가 대대적으로 왕궁을 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째서 이제와 행동패턴을 바꾼 것인지 의아해 하는 찰나 누군가가 다시 소리쳤다. ‘저건’ 레이븐이 아니라고.
그 외침에 호응하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성벽위의 괴도는 가면을 벗어 모자의 챙처럼 위로 들어올렸다. 비스듬한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사막의 푸른 달 아래 드러난 맨얼굴은 무척이나 수려하고도 아름다웠으나 그 성별을 착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벽의 사막을 연상시키는 하얀 피부와 날렵한 콧날. 선명한 보랏빛의 눈동자는 의기양양했고, 상황을 즐기듯 유쾌함을 머금으며 붉은 입술은 초승달처럼 요염한 곡선을 그려낸다. 퍽이나 근사한 미소인지라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마저도 미약하게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터번처럼 모자에 둘둘 매어 화려한 보석과 깃털로 꾸며진 푸른 시폰 벨벳이 길게 늘어뜨려져, 눈처럼 새하얀 망토와 함께 사막의 바람에 펄럭인다. 끝에 마감되어 있는 풍성한 금빛의 술들이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지팡이에 얽혔다 떨어지길 반복한다.
등 뒤에서 몰려오던 바람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잠시 멈추고는 풍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모자 아래로 흘러내린 백금의 머리칼이 푸른 달빛에 녹아내릴 것처럼 흔들린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칼을 가볍게 왼손으로 쓸어 넘긴 후 눈을 깜빡인다. 오만하고 화려한 기품을 선보이며 당당히 발아래의 병사들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프롤로그는 이쯤이면 충분하다. 쇼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분홍빛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웃으며 턱을 들어올렸다.
“기억해라, 내 이름은 팬텀Phantom! 레이븐의 뒤를 잇는 괴도다!”
사막 특유의 메마른 바람은 새로운 괴도의 등장을 환영하듯 난폭하게 몰아치며 긴 옷자락을 뒤로 잡아끌었다. 뒤로 넘어가는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서둘러 쫓아갔으나, 붉은색과 푸른빛으로 반짝거리는 수많은 카드를 흩날리며 그는 성벽 너머로 사라진 이후였다.
이것이 괴도 팬텀의 이름이 온 대륙에 널리 퍼지게 된 첫 사건이자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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