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등을 살포시 덮은 아주 옅은 분홍색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보드라운 봄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췄다. 백발에 가까울 만큼 하얗고 작은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매끄러운 긴 머리칼도 그와 함께 움직인다. 이전까지는 징그러울 만큼 붉었던 머리칼이다. 너무 붉고 붉어서 모두가 싫어했던 색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지 않은 머리칼이 온통 하얗고 옅게 바래졌다. 너무너무 아팠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렇게 변해 있었다. 아이는 이런 제 머리색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머리칼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선명한 붉은 눈동자는 거울에 비춰지는 제 모습을 본다. 신기하다. 아이는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피부에 감겨든다. 두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머릿속에 각인된 단어들을 끄집어냈다.

신기하다. 새롭고 기이하다. 오늘도 배웠던 말을 떠올렸다. 떠오르는 단어와 그 의미를 꼬리에 꼬리를 답삭 물며 줄줄 이어갔다. 끝없는 긴 생각을 반복하며 잊지 않도록 꼼꼼히 다시 기억했다. 무엇하나 빠짐없이. 소중한 보물을 보석함에 조심스럽게 담아두는 것처럼 ‘가족들’에게서 배웠던 말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가족이라곤 본디 저를 낳은 생모뿐이었다. 사실 그것을 가족이라 말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제 연구에 빠져 자신에겐 시선 한 톨 주지 않던 생모로부터 “생겼기에 낳았을 뿐이다.” 라고 돌아온 대답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있다. 비록 모두가 같은 피가 흐르지 않더라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겨준다.

제 얼굴을 보던 눈을 도르륵 움직여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가느다란 몸을 사랑스러운 분홍색과 흰색의 천으로 덧대어 만들어진 쉬폰 원피스가 감싸고 있다. 굉장히 곱고 예쁜 옷이었다. 예전에는 늘 누더기만 입었었는데. 매일매일, 이 옷을 보는데도 예쁘다는 감상은 그대로다. 조그만 머리로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던 것을 멈추고 말끄러미 보다가 제 자리에서 빙그르 가볍게 돌아봤다. 제가 돌자 방의 풍경이 변했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중심을 못 잡아서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처음 입어본 원피스의 치맛자락은 날아오는 나비의 비단날개처럼 보드랍고 폭신폭신하게 팔락거린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 번, 두 번, 더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아보았다. 이 원피스는 봄도 됐는데 내 체구에 맞는 옷이 없다하여 눈처럼 새하얀 ‘큰언니’와 함께 나가서 산 ‘내 옷’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돌아다녔고, 처음으로 이런 간지럽고 하늘하늘한 예쁜 옷을 입었고, 처음으로 난생 처음 보는 맛있는 먹을거리를 많이 맛봤고, 처음으로 똑바로 고개를 들어 두 눈으로 세상을 둘러봤고, 처음으로 즐겁게 웃는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와서 수많은 「처음」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지금까지 배운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차오르는 감정은 매우 낯설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면서도 아팠다. 이를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고 끙끙 앓다가 결국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버렸다. 제대로 걷질 못할 정도로 울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언니의 품에 꼭 안겨 가게 됐다. 따뜻하고 아늑한 품. 체온. 닿은 몸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의 진동도-.


[우리 오르. 왜 울어. 울지 마렴.]


나를 향하는 그 상냥한 미소마저도…. 집에 도착했을 때에도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많은 가족들이 당황해 했지만, 어째서 우는지 이유를 듣고는 까르르 웃더니 한 번씩 돌아가면서 보듬어주고 끌어안아줬다. 크고, 작고, 상냥하고, 보드라운 손이 등을 쓸어주고, 아늑한 품이 작은 몸을 꼭 껴안아 줬다. 구름처럼 폭신폭신하고 깃털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우리 오르가 많이 외로웠구나. 그 말을 시작으로 다정한 말들이 조곤조곤 들려왔다. 진심어리고 애정 넘치는 말들이 홍수처럼 넘쳐흘러 마음에 스며들어 왔다.


많이 외로웠지?

많이 아팠지?


괜찮아.

이젠 괜찮아.


지금 네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그건 「기쁘다」는 감정이란다.

「행복」이란 거야.

모양도, 냄새도, 만져볼 수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형태란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너의 마음이야.

너무 좋고 또 좋아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뻐서,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돼. 이젠 많이많이 웃어주렴.


―예쁘게 웃어보렴.


주문 같은 상냥한 말들이 이어지고, 그 단어 하나하나는 조심스럽게 마음을 톡톡 두드려줬다. 따뜻했다. 상냥하고 보드라운 마음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상처를 쓸어줬다. 포근하게 감싸이는 느낌. 조심조심.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고 온기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또 기쁘고 기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질 못해 그렇게 목 놓아 엉엉 울어버렸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코가 잔뜩 빨개지고, 못난이처럼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울었다. 눈물콧물 범벅이 되고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기침이 마구 터져 나올 정도였다. 분명 흉했을 텐데도 언니들은 이런 나를 품에 안아줬고, 오라버니들은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줬다.

그렇게 한참을 다 울고 나서는 둘째 언니가 가져온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작은 오라버니가 타준 허브티와 언니들이 직접 만든 간식을 모두와 함께 나눠 먹고, 큰 오라버니의 무릎 위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듣고, 큰언니의 신비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깃털 이불에 안기고 가족들의 품에 안겨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앙상하게 말랐던 손도, 팔도, 다리도, 깨끗해져갔다. 등의 커다란 흉터 역시 많이 옅어져가고 있었다. 상흔傷痕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더 이상 아픔은 없다.


[자양화紫陽花로 하자. 오르텐시아Hortensia.]


‘가족’이 된 이틀째의 아침이었다. 약간은 소란스럽지만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흔들의자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가던 큰언니가 나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자 들고 있던 것을 옆으로 내리곤 나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혀주었다.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품에 꼭 끌어안아 준다. 큰언니에게선 늘 보드라운 냄새가 났다. 숲의 냄새 같기도 하고, 꽃향기 같기도 했다. 몸을 감싸오는 체온이 너무도 기분 좋아서 아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품에 안겨 있을 때, 그런 말을 했다. 낯설고도 긴 말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선명한 녹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미소를 담았다. 언제나 상냥한 말만을 해주던 입이 열리면서 대답해줬다. 오르텐시아. 너의 이름이란다.

수국水菊이라고 많이 불리는데, 꽃의 빛깔이 워낙 다양해서 변덕쟁이란 소리를 듣지만 사실은 늘 올곧은 진심을 품고 있단다. 이름의 이유는, 우리 오르가 언제 어디서든 수국처럼 곱고, 누구에게든 진심어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언니의 바람이란다. 하얗고 예쁜 손가락이 가볍게 코를 콕 눌렀다. 그 말 이후 많은 가족들이 우리 주변에 모여 앉거나 서서 또다시 즐거운 소란이 일어났다. 큰오라버니는 큰언니에게서 내 이름을 듣고는 잠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생긋 웃으며 양 뺨을 꼬집는다. 오냐, 예쁘다 내 새끼. 낯설어도 그것이 싫지 않아 가만히 있자 사방에서 고함이 터졌다. 니 애 아니다, 이 도마뱀!! 자신을 향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움츠러들법한 고함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마저도 좋아서 마냥 좋았다.

소란스럽고 복잡하더라도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따스함이 이곳엔 존재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았다. 온통 분홍색의 소녀가 서 있다. 가족들이 그토록 예쁘다고 칭찬해줬던 아이였다. 자신이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왠지 쑥스러워서 입가가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언니가 나를 불러왔다. 오늘은 셋째 언니와 함께 마을에 나가기로 했다.


“오르? 준비 다 됐으면 그만 나가자.”

“네-!”


그리 대답하곤 다시 한 번 더 거울을 들여다봤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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