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mance

[게임]팔라딘x비숍

no_R 2012. 7. 31. 17:02

 

 



“당신은 어째서 이 길을 걷기로 결정한 거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계까지 제 힘을 쏟아 부은 뒤 졸도하듯 쓰러져버린 비숍Bishop을 등에 업고 눈 위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신의 뜻을 따르며 빛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한 팔라딘Paladin은 조용히 그렇게 물었다. 자신으로선 아무리 생각해보더라도 당신에게 맞는 직업은 이 길 뿐이었으나, 당신이라면 아마 이 길 말고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가 충분히 있을 테니. 우문愚問이라 할지라도 그로선 진심으로 궁금했고, 매번 이렇게 쓰러지는 이가 안타까웠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이 아려왔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니 추운 밤공기에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가 아스라이 사라져간다. 보석을 곱게 빻아 뿌려놓은 듯,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빛무리는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마치 자신의 등에 업힌 남자처럼 말이다. 어차피 대답이라곤 기대하지 않고 한 질문이었으니, 일괄되는 침묵에 팔라딘은 쓰게 웃었다. 차가운 바람이 매섭다. 혹여 등 뒤의 남자를 덮고 있던 모포가 날아가지 않았나 싶어 자리에 멈춰 서서 확인해봤다.


고개를 틀어 확인해보니 머리까지 잘 덮고 있다. 후,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비숍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별빛에 의지해 살펴본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다.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가―. 하긴 그럴 수밖에. 다른 때보다도 유독 더 많이 힘을 쏟아 부운 비숍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보게 되었던 아이로 인해 거의 모든 힘을 소진했다 봐도 맞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호흡마저 멈춰버렸으니. 척 보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병으로 인해 살이 빠지다 못해 바짝 마른 팔다리에 비해 복수가 차 비정상적으로 배가 부풀어진 아이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했다. 설원 지역의 마을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일구며 살아갈 땅이 눈에 얼어붙고 무척이나 척박해 추위에 강한 몇몇 식물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작물이 재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 마을들은 사냥꾼들을 기르고, 이번에 방문한 마을 또한 그러했다. 다음 마을까지 함께 동행 해줬으면 했던 그들은 이미 도회지로 떠났다고 한다.


어쨌든 이미 쓰러졌다면 진작 쓰러졌을 비숍은 이상할 만큼 고집을 부리면서 버티고 있었다. 계속해 더 이상 봐드릴 환자는 없는 거냐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되묻는 이유를 알 수 없던 지라 팔라딘으로선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러다 감사하단 의미로 따뜻한 산양 젖을 한 그릇씩 내어줬던 마을의 촌장이 마을에서 나가 쭉 가보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오두막에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아비와 아이가 산다는 것을 알려줬고, 그 말을 들은 비숍은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게 언제인 것 마냥 날쌘 비호처럼 뛰어갔다. 신의 의지를 따르는 자로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남자였기에, 팔라딘은 묵묵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말릴 수 있다면 애초에 말렸겠으나 그러질 못하기에 그저 바라볼 뿐이다.


도착한 오두막에는 부인과 한쪽 다리를 몬스터에게 잃어버린 사냥꾼이었던 아비와 하나뿐인 아이가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올 가을 초, 아이의 정체모를 병으로 인하여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그들이었다. 의사가 없는 마을이기에 아이의 병을 봐줄 이란 없다. 괴질이었기에 혹여 이게 돌림병이 아닐까 싶어 겁먹은 마을 사람들이 이 부자를 마을에서 쫓아내버렸고, 한때 마을의 사냥꾼으로서 활약했던 남자에게 있어서 그런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끝없는 배신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마을 사람들과 단절된 채 병으로 앓는 아이만을 돌봐왔던 아비였기에 비숍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이의 상태를 처음 본 순간 팔라딘은 설원의 눈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린 비숍의 얼굴을 기억한다. 긴 소매 속으로 서둘러 숨겼으나 바르르 떨리던 가느다란 손 또한 보았다. 그만큼 아이의 상태는 비숍에게 절망을 안겨줬다.


그리고 자신이 느꼈던 절망만큼, 남아있던 성력을 쥐어짜 아이에게 쏟아 부운 비숍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이만한 힘이 남아있던건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를 말려선 안 된다고 끝없이 되뇌며 버티던 자신이 결국 참질 못해 비숍을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이를 살리는 대신 비숍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리석을 만큼 무모하다는 건 이 남자와 한 조가 되어 움직였을 때부터 알았지만, 이번만큼 무모했던 적은 없었다. 아이에게 붙어 있던 것을 강제로 떼어냄과 동시에 비숍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으며 까무룩 기절해버렸고, 그를 한계 끝까지 몰아붙이다 못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게끔 만들 정도로 힘을 쏟아 붓게 만든 아이는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충분히 상태가 호전된 뒤였다.


기절한 비숍을 품에 안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그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가였다. 코 아래 손을 가져다 댔지만 얼어붙은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호흡을 멈춰버린 것인지 내쉬는 숨결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느꼈던 공포는 가히 표현할 수 없는 것. 팔라딘이 되기 전, 대륙 곳곳을 모험하고 다니면서 온갖 것을 보고 경험한 그였으나 이만큼 무언가를 두려워했던 기억은 없었다. 서둘러 바닥에 눕히고 심장위에 귀를 가져다 댔다. 제발 아니기를, 제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를. 입으로 심장을 토해낼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으며 비숍의 가슴에 귀를 눌렀을 때 그 무엇도 들려오지 않음에 순간 팔라딘의 시야가 새하얗게 질렸다.


그 이후 어땠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모험가 시절 이것저것 알게 됐던 지식들을 이용해 그가 호흡하도록 만들기 위해 날뛰었다. 이 세상에 한줌의 흙이 되어 사라질 육체마저도 신의 것이라는 비숍의 입술에 감히 입을 맞추며,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다시 당신의 심장이 뛰어주기를. 제발 이렇게 떠나지 말아주길―! 비록 전하지 않은 채 묻어둘 감정이라 마음먹었다 한들, 이렇게 당신을 떠나보낼 것이라면 차라리 말할 것이라고 후회하며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반복해가던 찰나, 작은 기침과 함께 가느다란 몸이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파드득 튀어 올랐다.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둘러 몸을 낮춰 다시 그의 가슴위에 귀를 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려오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살아있음을,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비로써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할 수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나의 신이시여, 나의 주인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바보 같은 사람을 당신의 곁으로 데려가시지 않아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쓰러지듯 비숍의 위에 몸을 기대며 수없이 신에게 감사하단 기도를 신음을 내뱉듯 올린 팔라딘이었다. 이후 맑은 눈물을 흘리며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꾸벅 하는 아비에게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을 들은 뒤, 여전히 기절해버린 비숍을 업고 오두막을 나온 자신들이었다.


이 지역은 모험가 시절 한 번 들렸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 워낙 길이 복잡하고, 산을 타야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확인하면서 가지 않으면 길을 헤매거나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실수라도 몬스터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 또한 있어선 안 되기에 물으면서 가는 게 가장 좋다. 신전의 성기사임을 알리는 갑옷대신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어느 때보다도 확연히 느껴지는 등의 온기에 안도했다. 미운 정이 무섭다고 했던가. 일정한 리듬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는 소리가 귀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따뜻한 입김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사라져간다. 그 가련함에, 아련함에, 닿지 못할 것이 분명한 스스로의 마음이 안타깝고 슬퍼서 팔라딘은 소리 없이 웃으며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등에 업힌 비숍에게 말했다. 오히려 그가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왜냐면….


“…당신 때문에 늘 심장이 제 자리에 있던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떨어지는 줄 알았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뿐인가. 자신의 호흡마저도 덩달아 그와 함께 멈춰버리는 줄만 알았다. 당신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맹하지만, 신의 빛만큼이나 눈부시도록 환한 그 미소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온몸을 타고 돌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더 당신이 살아있음을 신에게 감사드리며 멈춰있던 걸음을 옮기는데, 속살거리는 듯 나직한 웃음소리가 달팽이관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죄송합니다…. 또, 걱정 끼쳤네요.”

“……정신 차린 건가?”

“예.”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그것을 감추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늘 고맙습니다. 새소리처럼 작고 힘없지만 어딘가 기쁜 듯 흔들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손톱달처럼 눈매를 곱게 휘며 웃고 있을 얼굴이 떠올랐다. 변함없는 미소를 떠올리며 팔라딘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은 그에게 저런 감사를 받을 처지가 되지 못하거늘. 가슴께가 아려오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걱정을 끼쳤다는 것을 안다면 제발 무리하지 말아줬음 좋겠는데, 라는 말을 시작으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기절했던 비숍이 깨어나면 항상 해왔던 잔소리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들어먹 힐 리가 만무하다. 결국 이번에도 미안해요, 하지만 무리에요. 라는 대답과 함께 얼빠진 웃음소리를 들으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어차피 그럴 거란 걸 알았기에 팔라딘 역시도 웃어버렸다.


정신도 차렸고 이젠 괜찮으니 자신이 걷겠다며 내려달라는 비숍의 말에 팔라딘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미 업힌 거 그냥 이대로 있으라고 해도 그럴 순 없다며 순 고집을 피운다. 이 비숍은 겉으론 유순한 듯해도, 사실은 엄청난 고집쟁이다. 덕분에 그를 알게 된 이후, 초반에 얼마나 서로 딱딱 부딪혔던가. 사제와 트러블을 일으키는 성기사라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동기들 간엔 제법 유명한 일화였다. 설마 이렇게 함께 다니게 될 줄은, 그땐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계속해 내려달라며 고집부리는 비숍에게 어차피 내려주더라도 제대로 걸을 수 있을 만한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으면서 왜 그리 고집을 부리는 거냐고 따끔하게 한소리를 하자 그제야 꾹 입을 다문다. 그가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하던 마음은 어느덧 평소 때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여간 못 말릴 남자다. 잔뜩 걱정 끼친걸 알았으면 이번만큼은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자, 작은 머리가 끄덕끄덕 움직인다.


“하지만…, 무겁지 않나요?”

“딱히. 당신은 지나치게 말랐으니까.”

“마른 것과 가벼운 건 다르잖습니까. 저도 엄연히 성인 남자란 말입니다.”

“성인 남자가 보통 성인 여성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게 정상은 아니지.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일단 좀 쉬어.”


설원 지역에 들어선 이후로 계속해 강행군을 해오고 있었다. 팔라딘인 자신도 버거운 일정이었으니, 체력이 약한 비숍에게 있어선 이미 한계치를 충분히 넘어섰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건 그놈의 고집과 함께 그나마 아주 잠깐 기절하는 정도로만 힘을 사용해 왔는데, 이번에는 호흡이 멈춰버릴 만큼 엄청난 무리를 했다. 자신은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신전에서 일정기간 대륙순례를 떠나는 프리스트나 비숍에게 반드시 팔라딘을 호위로 붙여주는 이유는 그들이 안전하게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지키고 도우라는 것이다. 팔라딘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보더라도 이 비숍의 호위로서 자신을 결정해준 신전의 선택에 감사할 따름이다. 동기나 다른 사람들이 이 고집쟁이를 이길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이리 생각하는 스스로의 오만함에 조소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지 않은가.


다행히 다음 마을은 이 지역에서 가장 상업이 활발하게 발달한 도회지였다. 그곳에 가서는 푹 쉴 수 있겠지. 큰 사치를 바라진 않는다. 단지 등에 업혀 있는 이 남자가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자와 무게가 비슷하단 소리에 말도 안 된다며 꽁알거리면서도 얼마안가 곧 조용해진 비숍이었다. 역시 멀쩡하다는 말은 허세였던 거다. 사제란 자가 어찌 그리도 앞뒤 재지 않고 고집을 부렸던 건지. 그래도 더 이상 말없이 얌전히 있어주니 다행인건가. 계속 고집을 부렸더라면 아마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후, 한숨과 함께 비숍을 고쳐 매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설산을 내려가는 것이기에 최대한 흔들지 않으려 해도 쉽지가 않다. 가벼운 충격이 계속되자 얕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되는 마음에 괜찮으냐고 물으니 버틸만하단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하단 사과를 건네며 고개를 들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주기를. 저 멀리로 마을의 빛이 보여 온다. 이제 산을 내려가 숲을 빠져나가면 마을이다.


얼마 남지 않았단 사실에 조급함을 느끼며 유독 거대한 침엽수의 옆을 지나치는데, 그 순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헉, 짧은 신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방금 그 소리는 도대체…. 아기의 비명소리를 닮은 그것은 끔찍하게 소름끼쳤고, 그만큼 팔라딘의 몸을 긴장시켰다. 가까이에서 들려온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이 근처다. 지금껏 갈고 닦아온 예리한 감각이 그리 외치고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다고. 재빠르게 지금껏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다가 아차 했다. 그리고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라딘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몸을 확 틀어 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팔라딘이 된 이후로 입에 올리지 않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밤이 되어 방향감각이 둔해진 탓에 원래 가려던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벗어났다보단, 이 길은 지름길에 속했으나 몇 년 전부터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이동해왔기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길이 되어버렸다고 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화이트팽이라면 그나마 마음이 편했을 거다. 허나 이곳은 예티들의 영역이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몬스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저를 부르는 비숍에게 꽉 잡으라는 말을 하며 정신없이 뛰었다. 사실 야간의 이동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다음 마을로 가 의원에게 등에 업힌 남자를 보이고 싶었기에 욕심을 부렸다. 지금껏 잘 왔었기에 방심해버린 자신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 부렸던 욕심이 오히려 그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 급경사를 뛰다시피 내려가는 팔라딘이였다. 쌓인 눈이 쿠션 역할을 해주니 망정이지, 눈이 없었더라면 분명 뼈에 금이 가도고 남았을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눈이 없어 뼈에 금이 가는 일이 있더라도 팔라딘으로선 뛰어야 했다. 경사면에서 몬스터와 부딪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적어도 몬스터를 상대하기 수월한 평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기를―!


그런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예티들과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거의 산을 내려온 뒤였다. 대체로 베어울프 같은 강한 몬스터들은 산의 깊숙한 곳에 무리지여 살고, 그것들에 비해 약한 몬스터들은 외각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예티는 베어울프와 화이트 팽의 중간위치로 그렇게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는 레벨이었으나, 이들이 완전히 외각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던 건 페페만큼이나 난폭한 성질머리와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습성 때문이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유독 숲의 어둠보다도 더 검은 거대한 덩치의 그것들은 두 눈을 번뜩이며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티의 영역으로 완전히 들어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 쪽으로 왔던지라, 생각보다 주변으로 모여든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점일까. 대충 세어봐서는 서른 마리 남짓, 혹은 그 이상. 혼자였다면 모조리 베어 넘겨버리고도 충분한 숫자였으나 지금 자신으로선 지켜야 할 이가 있다. 방심도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 대검을 빼들면서 업고 있던 비숍을 천천히 눈밭 위로 내려놓았다. 가능할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웃으며 물었다.


“아마 무리지?”

“…예. 죄송….”

“아니, 그 말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냐.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사과해야 해. 위험에 빠지게 했으니까. 미안하다.”

“아뇨, 아뇨! 그런 무슨―!”

“그만.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좋아. 그럼 일단―최대한 내 옆에 붙어있어.”


붕붕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비숍의 말을 자르며 경고했다. 지금부터 절대로 움직이지 마. 떨어져서도 안 돼. 알았지? 흔히 그가 신전에 위탁된 아이들을 돌보면서 착한아이는 이러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말하자, 무언가를 잔뜩 쏟아내려는 갈망이 가득담긴 눈으로 올려 봐온다. 입술이 연신 달싹 거리지만 어떤 단어도 내뱉지 못한 채 안타까운 탄식만 흘릴 뿐이다. 그런 비숍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지만, 팔라딘으로선 확실한 대답을 원했기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셨습니까, 고집쟁이 비숍님?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되물었을 때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비숍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싱긋 웃어주는 것과 동시에 팔라딘은 검을 움직여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재빠르게 튀어오는 주니어 예티를 베어 내렸다. 쇠붙이를 통해 살아있는 생명의 몸뚱어리를 가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키에에에에-!!!!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리고 피비린내가 퍼졌다. 시작은 주니어 예티였겠으나, 이후 달려드는 것은 거대한 덩치의 예티와 다크 예티일 것이다. 팔라딘은 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팔라딘Paladin. 신의 뜻을 따르는 성스러운 전사로서, 그를 모시고 경배하는 사제들과 세상의 가련하고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신에게로부터 유일하게 살생을 허락받은 빛의 기사. 긴 수행기간을 거쳐 진정한 빛의 기사가 되었던 그 날, 여신상 앞에서 그들을 지키겠노라 신께 맹세하였다. 그리고 또한,


-신께서 나에게 검을 허락하신 건, 분명 그대와 같은 어리석은 사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당신과 함께 순례의 첫 길을 나서던 그 해, 잠든 그대를 끌어안으며 맹세했다. 당신을 지키겠다고. 그러니 그 맹세를 관철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움직였다간 분명 등 뒤의 이에게 몬스터의 공격이 향할 것이다. 비숍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옮기기 위해 갑옷 대신 방한복을 입었던 탓에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났지만 오랫동안 전사로 살아왔던지라 이 정도는 별것 아닌 축에 속했다.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가까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일격에 베어내는 것이 수월해 마음에 들었다. 몸을 미끼로 내세워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누군가를 지키며 몬스터들을 베어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하고 심플한가. 그러나 팔라딘의 길을 걸은 뒤 찾아온 평안에 익숙해져버렸던 것인지 처음에는 마음에 들었던 상황이 점점 짜증날 만큼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거의 상황이 마무리 갈 때 즈음에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평소 단련을 게으르게 하지 않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역시 사람의 대련과 몬스터와의 실전은 천지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데. 팔라딘은 깊숙이 파고들어오는 다크 예티의 오른쪽 팔을 잘라내며 미간을 좁혔다. 겨우 이놈을 포함해 총 두 마리만 남았을 뿐이다. 이미 주변은 몬스터들의 시체와 흩뿌려진 피로 엉망진창이다. 이놈을 처리하고 저 앞의 유일하게 달려들지 않고 검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만 있는 예티를 처치하고 나면 되는 일인데….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라 쉬며 팔라딘은 괴성과 함께 휘두르는 다크 예티의 왼손을 막아냈다. 꺼내들었던 것이 대검이어서 망정이지. 평소처럼 세이버를 꺼내들었더라면 아마 진즉에 부러졌을 것이다. 앞발이 잘린 고통 때문인지 대검을 내리치는 힘이 무지막지했다. 제 공격이 한번 막히자 괴성을 지르며 계속해 검 위를 내려친다. 돌처럼 단단한 주먹이 날과 부딪힐 때마다 쾅! 쾅!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막고 있는 팔을 눌러온다. 후려치는 것을 한번 막을 때마다 검을 들고 있는 두 팔이 저릿저릿하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굉장한 힘이다. 애초에 부실한 하반신 대신 발달한 두 팔과 손으로 땅을 딛고 걸으며 살아가는 몬스터니 당연하겠다만, 오랜만에 막으려니 힘이 부친다. 예전엔 거뜬했던 것 같은데. 이런 걸로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니 씁쓸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다시 한 번 더 팔이 들어 올려졌을 때를 노렸으나, 다시 내려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옆으로 파고 들어오는 거대한 손에 서둘러 검을 오른쪽 지면에 세워 박았다. 내려치는 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짧은 시간에 학습한 건지 공간이 빈 오른쪽으로 팔을 휘둘렀다. 쾅! 혹시라도 힘에 밀려나버릴까 싶어 어깨까지 검날에 기대며 막았던 탓인지 온몸으로 충격이 전해졌다. 어마어마한 힘에 골이 가볍게 울렸다. 그러고 보니 이것들이 화이트팽처럼 외각으로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나름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 외로 지능이 높다는 것이다. 아직도 저린 팔을 억지로 움직여 곧장 검을 뽑아낸 뒤, 곧장 다크 예티의 한쪽 팔을 마저 잘라냈다. 고통에 가득 찬 생물의 울부짖음과 함께 뜨뜻미지근한 피가 머리 쏟아졌다. 역한 피 비린내가 코 안쪽을 날카롭게 찌른다. 미간을 좁히며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신에게로부터 살생을 허락받았다 한들 되도록 고통 없이 숨통을 끊었으면 바랐기에 단숨에 목을 베어버리기 위해 궤도를 그리던 찰나, 그때까지만 해도 움직이지 않던 또 다른 예티가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아니, ‘저걸’ 예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숲의 어둠에 가려 제대로 파악할 수 없던 그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기세로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려오는 그것에 팔라딘은 서둘러 등 뒤의 비숍을 옆으로 밀쳐내며 그 자리를 피했다. 쿠-웅! 지금까지와는 다른 묵직한 소음이 숲에 울렸다. 나무들이 파스스 몸을 떠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것이 머리를 박아 넣은 자리와 가장 가까웠던 침엽수가 바르르 몸을 떨며 눈을 한 무더기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하마터면 저 괴물에게 짓눌릴 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예티와 비슷한 생김새였으나 분명 다른 모습이다. 재빨리 비숍을 다시 등 뒤로 숨기며 자세를 잡았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눈앞의 것에 집중했다. 이제 시간은 한밤중을 지나 서서히 다가올 여명을 기다리고 있다. 완전히 산을 빠져나온 것도 아니고, 숲속이었기에 어두컴컴한 건 여전했지만 처음보단 많이 밝아진 뒤다.


저게 바로 문서로만 전해지던 설원의 거인인가? 눈의 정령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괴물. 괴물의 겉모습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가졌으나 도저히 사람들과 섞일 수가 없어, 그를 안타깝게 여긴 눈의 정령이 통째로 얼려버린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그와 관련되어 떠돌아다니는 소문은 많았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조차 없는 그런 것들이어서 그저 전설로만 치부해왔는데…. 모험가 시절에도 만난 적이 없던 것이었기에 팔라딘은 골치 아픔을 느꼈다. 미치겠군. 어째서 다른 예티들처럼 달려들지 않고 가만히 있나 했더니, 이래서였나? 다른 때라면 만날 일이 없겠지만, 지금 있어서 가장 피했어야 할 몬스터를 만나버렸다. 이것 참 재수가 없군요. 가볍게 농담을 하듯 대수롭게 넘겨버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한번 푸르르 고개를 휘저으며 눈을 털어낸 거인은 번뜩거리는 까만 두 눈을 이쪽으로 향했다. 번들거리는 두 눈에 가벼운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긴장에 굳어버린 뻣뻣한 목을 가볍게 움직여 풀면서 긴장의 날을 세웠다. 온순하고 부끄러움 많은 성격이라는 전설과는 달리 완전 흉포한 몬스터의 얼굴이다. 어쨌든 공격을 해온다면―눈의 정령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죽여야겠지. 저것을 사냥하지 못할 만큼 힘이 완전히 다 빠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지켜야할 것이 있다. 그러나 지켜야 하기에 발목이 묶인 상태였다. 비숍을 떼놓고 움직이자니 주변에 아직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다. 도망칠 수 있다면 참 좋을 터인데. 주변을 살피며 서서히 물러서던 찰나 덩치와 맞지 않은 재빠른 속도로 괴성을 지르며 뛰어오는 거인의 위압에 순간적으로 움츠려들고 만 팔라딘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막으려고 했으나 거인의 일격에 속수무책으로 대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차! 어깨가 뜯겨지는 통증과 함께 온 몸이 휘청거리는 힘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재빨리 몸을 바로 잡으며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던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거인의 반대 팔이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가 빠르게 머리 위로 떨어짐에 팔라딘은 각오를 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비명과 함께 새하얀 빛이 터졌다.


“…안 돼!!!!”


힐조차 주지 못할 만큼 성력이 바닥났던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이만한 힘이 나온 걸까 싶었다. 한순간 시야가 사라질 정도의 엄청난 빛에 숲 내부는 대낮보다 더 환해졌다. 업혀 오던 동안 그나마 차올랐던 성력을 쥐어짜내 잠깐이나마 발현한 것이었기에 거인에게 심한 충격은 줄 수 없었지만, 충분히 팔라딘을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거인이 화들짝 놀라 공격을 멈추고 물러서자, 행동에 팔라딘은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속도로 발도하며 가로로 거인의 몸을 베었다. 울음소리를 닮은 긴 비명에 숲이 흔들렸다. 얼굴로 피가 튀는 느낌이 영 개운치가 않다. 베었다 한들 갑작스러운 빛에 자신도 휘청했던지라 제대로 날이 박히지 않았다. 치명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간 거인에게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이번엔 제대로 검을 고쳐 쥐며 다시 한 번 더 베어내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강풍에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아버렸다. 강한 바람에 쓸려 날려 온 눈발이 눈에 들어갔다. 서둘러 머리를 턴 후 다시 눈을 뜬 팔라딘이었지만, 이미 거인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뭐지? 예상치 못한 운과 당황스러움에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방금 전 발현됐던 빛을 퍼뜩 떠올리곤 서둘러 돌아서 비숍을 봤다. 힘없이 쓰러지려는 몸을 황급히 뻗은 두 팔로 받아내며 팔라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당신, 무슨!”

“하……. 다, 행…무사하신…….”

“도대체가, 당신이란 사제는 정말이지…!!”


와락 인상까지 쓰며 서둘러 비숍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열이 심하게 올라있었다. 힘을 한계까지 썼던 상태에서 다시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아까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지 못하다는 건 여전하다. 서둘러 마을의 위치를 떠올리며 비숍을 고쳐 안는데, 가느다랗게 떨리는 차가운 손이 뺨에 살짝 닿아왔다.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안도했다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다행…이에요. 심, 하게…다치지-않아서….”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간신히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버린 비숍이었다. 열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치료 이외의 접촉은 일절 없어왔던지라 아주 잠깐 멍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팔라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비숍을 등에 업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공격으로 입었던 상처들이 터지고 눌리는 고통이 심했지만 뛰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얼마나 뛰었을까. 거의 마을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횃불을 들고 나와 있는 몇몇의 젊은 남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을 입구를 서성거리고 있다가, 온 몸이 엉망진창으로 사람을 업고 뛰어오는 제 모습에 하나같이 놀라며 서둘러 마을 안으로 들여 주며 여관의 방을 잡아주고, 이 새벽에 의사까지 불러와준 그들이었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곁을 지켜주고 있던 남자들 중 한명에게 어째서 입구에 나와 있었는지 이유를 들어보니 갑작스럽게 산 근처의 숲에서 터진 빛에 예티들의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바깥의 분위기를 살피던 도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비숍이 터뜨린 빛을 본 모양이다. 도회지답게 치안이 잘 갖춰진 것 같다. 덕분에 살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비숍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여명조차 채 찾아오지 않은 어중간한 어둠을 희미하게 비추는 촛불의 빛만이 가득한 방 안으로 비숍이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여관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찾아온 의사에게 자신보다 먼저 비숍을 보였으나, 당장으로는 안정을 취하는 것밖엔 어쩔 수 없단 진단뿐이었다. 병으로 인한 발열이 아니었기에 의사로도 손을 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한번 숨이 멎었던 것에 비해, 심한 탈진과 기운이 쇠약해진 것을 제외하곤 따로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하기에 안도할 수 있었다. 뒤집어썼던 피먼지를 모두 씻어내고, 치료까지 전부 끝낸 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끙끙 앓고 있는 비숍의 모습을 보자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시나 몰라 해열제도 함께 해놓았다는 약을 받아오긴 했다만 이것이 과연 들까 싶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조그마한 약지를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손 놓고 안절부절 하는 것 보단 낫겠지.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던 물병을 집어 들어 준비되어 있던 약그릇에 물을 따르고 약지에 들어있던 가루를 그곳에 풀었다. 가루가 풀어짐에 금세 물이 뿌옇게 변한다. 실수로라도 기도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 목 아래에 팔을 넣어 받친 뒤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 비숍의 입에 약그릇을 가져다 댔지만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흘러내릴 뿐이다. 입안에 들어오는 물마저 반사적으로 삼킬 수 있을 정도도 되지 못한다는 건가….


깨끗한 천으로 흘러내린 물을 닦아내고 마냥 앓고 있는 야윈 얼굴을 보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그릇 안에 남아있던 물을 입안에 털어 넣은 뒤, 비숍의 턱을 잡아 올려 입 맞췄다. 물이 그의 입안에 가득 찼다 싶을 즈음 깊숙이 혀를 밀어 넣어 상대의 혀를 눌렀다. 울컥하고 목울대가 움직이면서 물을 삼킨다. 가까이 보여 오는 긴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옅은 황금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색소의 두 눈동자는 보이질 않는다. 약이 완전히 넘어간 걸 확인 한 후 그에게서 떨어졌다. 옆으로 흘러내린 물기를 손등으로 가볍게 훔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려 덮었다. 톡톡, 목까지 덮인 이불을 두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하여튼 견실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방에 함께 갖춰져 있는 테이블의 의자 중 하나를 빼와 침대 옆으로 가져와 앉았다. 째깍째깍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올 정도로 고요하다. 약이 효과가 있던 건지 열에 들떠있던 숨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뒤였다.


물끄러미 잠들어 있는 비숍을 보다가, 삐죽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그의 손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불 안으로 넣어주려고 손을 잡아보니 지금까지 느껴봤던 온기 중 가장 따뜻했다. 따뜻하다보단 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따뜻하고, 뜨거워서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니 얼마가지 않아 건조하던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당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체온이 기분 좋아서 놓아야겠단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 잡고 있었다. 자신과는 분명 다른 형태였다. 처음부터 계속해 검을 잡아왔기에 굳은살이 박이고 물집이 터졌다가 아물고를 반복했기에 일반인들보다도 훨씬 투박하고, 상처 또한 많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는 달리 비숍의 손은 매우 가늘고 마디마디가 또렷하고 곧다. 신전에서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늘상 손에 스태프를 들고 있어야 했지만, 펜을 쥐고 있을 때가 훨씬 더 많기에 검지와 중지로 굳은살이 총총 박여있다. 겨우 서로의 손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뿐이지만, 그것으로 서로가 살아온 길이 얼마나 다르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다. 온기를 느낄 수 있고,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아직까지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많다. 그래도―,


“살아있고 함께 있는 한,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자.”


조금씩, 조금씩. 너무 느리다 하더라도. 맞잡은 손을 놓지 않는 한, 혹여 손이 풀려버리더라도 당신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부디 눈을 떠주길 바래. 맹하더라도 그 무엇보다 상냥한 당신의 미소를 보고 싶으니. 그런 당신을 보며 나 또한 웃을 테니까.



-End-



모처에서 놀다가 나온 썰에 발랑 낚여서 썼던 글.

꽤 재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