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mance

[애니]묘비 앞에서

no_R 2012. 7. 31. 16:54

사각사각, 머리칼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가끔은 금속 특유의 차갑고 매끄러운 부분이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가위가 움직이면서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허전한 기분과 함께 무언가도 잘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저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머리를 가볍게 눌러오고 있던 손의 무게가 사라진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끝이 코와 뺨 위를 가볍게 톡톡 치면서 무언가를 치워낸다. 아마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치워내는 게 아닐까. 이런 건 익숙하지가 않다. 애초에 얼굴을 드러낸 적도, 누군가가 만지게 한 적도 없다. 안경을 쓴 것도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피해야 할 이유도, 숨길 이유도 없다. 아니, 정확히는 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봐야 할 세계를. 단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토록 스스로가 변할 수 있다니.


다 됐습니다. 손에 떨어지면서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는 정중하고 차분하다. 난 이 목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나의 「주인」의 의붓형 중 한명이다. 그리고 내 「주인」의 마지막 말을 전해준―이젠 나의 시종이 된 이다. 나처럼, 스스로의 존재이유만으로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만들어버린 가여운 사람…. 그가 한 다 됐다는 말은 이제 눈을 떠도 된다는 소리다. 자, 이제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떠지질 않아. 어째서?


이건 막연한 두려움이다. 이전에 실컷 쏟았던 눈물 탓인지 눈이 따갑고 무겁긴 했지만 이것이 이유가 되진 못한다. 그저 두려울 뿐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변해갈 앞으로가. 그리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심연 깊숙한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에 감고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뜨면 네가 있을까? 네가 내 앞에 있어줄까?


엘리엇 나이트레이. 나의 「주인」.

누구보다도 고귀했고, 눈부셨으며 상냥했던 나의 주인…. 그의 시종이 된 이후로부터 눈을 뜨면 네가 항상 내 앞에 있어줬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믿고 싶었던 것. 근거도 무엇도 없었지만 밑바닥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굳어진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나무 특유의 딱딱한 감촉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다.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발 네가 눈앞에 있어주기를. 부디, 다시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끔찍했던 동굴에서의 사건 이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네가 있어줬던 것처럼. 내가 이상한 것뿐이니까. 모든 것이 내 착각이고 환상이고 오해일 뿐이니까.


―네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길지 않은 시간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것뿐인데도 눈이 부셨다. 가늘게 눈을 뜬 채로 깜빡거리면서 눈이 빛에 적응하길 기다렸다. 햇빛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방 안을 비추는 빛이 강하지 않았기에 오래 걸리지 않아 눈을 완전히 뜰 수 있었다. 깨끗해진 시야로 가장 먼저 보여 온 것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보여 왔던, 공중을 떠다니고 있는 무수히 많은 황금빛의 구슬들이었다. 둥실둥실, 가끔은 가볍게 춤이라도 추듯 빙글빙글 돌다가 휙 날아가는 크고 작은 화려한 빛 무리들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눈을 움직여 내 앞에 있을 이를 바라봤다. 적금안의 오드아이인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웃는다.


“어떤가요.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고개를 들어 웃고 있는 그를 보다가, 또다시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에 몸을 웅크렸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벌어진 입에선 짓이겨진 소리조차 세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소리도 없이 벙어리처럼 입만 뻐끔거리며, 다시 직면하고 만 현실에 아파할 뿐이다. 온 몸이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바르르 떨렸다. 가슴 깊숙한 곳이 끔찍하도록 아파왔다.


아아, 이제 너는 정말로 없는 거구나. 이젠 나를 불러줄 나의 주인은―이 세상에 없는 거구나.


“……끔찍해.”


엘리엇, 네가 없는 이 현실이 너무도 끔찍해.



 

Pandora Hearts

[엘리엇 나이트레이 + 리오 바스커빌]

묘비 앞에서 Stardust's Humming

-전하고 싶은 말



눈부신 날씨였다. 너무 눈부시고 눈부셔서 무심코 화를 내버릴 것 같은 그런 화창한 날씨다. 어째서 이토록 하늘은 맑은 걸까. 보통 소설책에서 흔히 나오는, 무대 위의 중요한 누군가가 비극적인 결말로 퇴장하게 되면 며칠 내내 날씨가 어둡거나 아니면 장마기간도 아닌데 비가 끝도 없이 쏟아지던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역시 그런 건 소설에서 뿐이다. 그러니 소설이지 않을까. 당연한 걸 두고 이렇게 따지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우습다. 하지만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면서도 나는 당장이라도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걸까, 싶어졌다. 이젠 흘릴 눈물도 없는데…. 그래도. 그렇다 해도. 조금 늦었어도 괜찮으니 비가 내렸으면- 하고….


깨끗해진 시야로 보여 오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를 바 없는 풍경이지만 새롭게 닿아왔다. 환하고 눈부시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만큼 절망스러웠다. 내딛는 발걸음은 이토록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변함없는 풍경이-.


요 최근, 며칠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유서 깊은 나이트레이 가의 가족묘지터는 제법 한산해진 후다. 두 명의 양자를 제외하고 당주를 포함한 본 혈족들이 겨우 몇 개월 사이에 멸족해버리다시피 했다. 그로인해 사람들 사이에선 수많은 억측과 헛소문들이 떠돌아다니기도 했으나 남은 공작가들의 재빠른 수습과 압력으로 지금은 잠잠한 편이다. 게다가 나이트레이 가의 체인-레이븐을 소유하고 있는 길버트 나이트레이 또한 여전히 판도라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뜬소문이 빠르게 잦아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수습되어, 사블리에의 비극을 재현시키려고 했던 어느 미친놈에 의해 발생한 비극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은 그게 아닐 진데.


가늘어진 입매사이로 새어나오던 조소를 멈추고, 조심스럽게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묘지로 들어섰다. 수수하긴 해도 예복은 예복. 이런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검은 상복을 입고 찾아왔어야 했겠지만, 오늘은 중요한 이를 맞이하러 가는 날이다. 이런 날만큼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야 하니 다른 날로 미뤘으면 했지만 안타깝게도 저쪽 사정에 맞춰 ‘우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지라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일찍 나왔더라면 그것대로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나 무리. 바스커빌의 이름을 계승하고 그 직후 바로 이뤄졌던 「계약」으로 한동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힘’을 조절할 수 있게끔 돼서야 저택에서 나올 수 있던 날이, 하필이면 ‘그’를 만나러 갔어야 한 날이었고―,

 

“하필 너의 무덤에 오는 날이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다른 묘비들과는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물푸레나무 아래에 세워져있는 묘비를 보고 누군가의 결정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한산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묘비. 아마 엘리엇의 의붓형 중 한명인 길버트 나이트레이의 결정일 것이다. 역시 그 답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묘비에는 엘리엇 나이트레이라는 이름이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 자신이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주인이 누워 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묘지터에 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자신 한명 뿐이다.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으니 그냥 떠오르는 대로 내뱉어도 될 터인데 쉽지가 않다.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수차례 말을 고르기를 반복하다가 푹,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이 무슨 바보짓일까. 쓰게 웃으며 천천히 묘비를 살펴보았다. 눈 속에, 머릿속에 각인 돼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도록. 잊지 않도록.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순간을 헛되게 허비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사실 욕심대로라면 하루 종일 이곳에 있고 싶었다. 하루 종일도 아니다. 있을 수 있다면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 만약 조금의 여유가―, 하루의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 난 상복을 차려입고, 고작 며칠 동안이지만 그 며칠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일들로 인해 좀처럼 정리하지 못했던 수많은 마음들을 털어내고,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쏟아내고, 복잡한 마음이 가아낮을 때까지 혼자서 떠들고 싶었다. 그랬더라면 조금이나마 이 허한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꼬박 하루를, 더 이상 내 이름을 불러주지 못할 네 곁에 앉아있고 싶었어.


“…어때? 지금은 좀 편해? 엘리엇.”


…편한 것, 같아? 돌아올 대답이 없단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땅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묘비를 쓸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무섭도록 섬뜩해서 손을 거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것은 엘리엇의 묘비니까. 아무리 싫어도 손을 때서는 안 된다. 늘 그가 했던 입버릇처럼,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러나-좀처럼 믿겨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당연히 웃으면서 내 옆에 있어 줄 것만 같았는데. 성격 급하고 다혈질에 입도 험한데다가 솔직하지 못했지만, 늘 곧고 상냥했던 나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그가 누워 잠들어 있다니….


자신의 체인을 부정했다고 들었다. 자바워크와의 계약을 위해 체인에 관한 세세한 설명을 ‘시종’에게서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어째서 죽었는지에 대한 것 또한 들을 수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더라면 어쩌면 엘리엇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미 엘리엇은 핵심 계약자였고 각인 역시 한참 진행이 된 이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래서―….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뜨거운 것을 토해내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며 간신히 참아 삼켰다. 딛고 있는 바닥은 분명 단단할 텐데 장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엘리엇. 난 너의 시종이어서 좋았어.”


네가 좋았다.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시간도 좋았다. 그건 무척 평화롭고 오직 나만의 세계 속에서 책에 빠져 지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의 시종이 되었던 그 시간들만큼은 혼자 있을 때보다도 소중하고 찬연했다. 하얀 빛이 온 몸에 쏟아져 내린 것처럼, 내 곁에서 난 따뜻하고 행복했어. 그런 감각은 생애 처음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찌 이토록 행복한 시간은 이리도 짧은 걸까.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너는 살아있었을까? 정신을 차린 이후, 피 웅덩이 속에서 숨을 거둔 채, 살아있었단 증거처럼 따뜻했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 너를 발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정말로 만약에.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만약―,


2년 전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2년 전 네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냥하고 눈부시도록 빛나면서 곧은 긍지와 함께,

엘리엇 너는 계속 살아있었을까―?


나의 「과오」로 인해 네가 죽지 않았을까?


부정적인 생각은 침식에 침식을 더해 나락Abyss까지 떨어져 헤어 나오질 못한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이렇게 자책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간신히 피가 멈추고 딱지가 앉았던 상처가 도로 터져,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도로 피를 쏟아낸다 하더라도. 그만큼 너를 좋아했기에.


만약 너의 시종이 되지 않았더라면.

만약 너를 계속 무시하고 피해 다녔었다면.

만약 너를 피아나의 집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어머니가 죽은 후 타인의 손에 이끌려 피아나의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일찍이 죽었더라면, 하고….


너무 흘려버려서 더 이상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쏟아졌다. 황급히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고 두 눈을 감아 눈물을 막았다. 막으려고 했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봐도 소용없는 짓이라고 비웃는 것처럼 멈추질 않는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나버린 걸까. 울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옥죄고 다그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끈도 없는 부정적인 생각 탓이었을까. 이런 나 자신과는 어둠과 빛처럼 정 반대였던 네가 너무도 그리워진 걸까. 간신히 억눌러놨던 감정들마저 둑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추스를 틈도 없이 쏟아지는 감정에 버티질 못하고 휘청거리는데 누군가가 양 어깨를 단단히 잡아왔다.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바르르 떨며 온몸으로 오열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누군가가 나를 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 의문이 들 무렵, 가라앉은 목소리에 알 수 있었다.


“이제, 가야 합니다.”


과연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의붓동생의 묘지를 보고 있는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눈물에 시야가 번지고 그의 긴 머리카락에 가려 제대로 볼 수도,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핏 보이는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가야한다, 라. 반겨야 할 손님께서 드디어 「새장」에서 나와 「미끼」의 역할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곳에 온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빠르게 시간이 지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더라면 무거운 몸을 재촉해서라도 빨리 이곳에 왔을 걸. 그럴 걸…….


아쉬워서, 마냥 아쉬워서. 조금 더 있고 싶어서, 그것도 안 된다면 한 순간이라도 더 볼 수 있도록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앞머리를 잘라내어 선명히 바라보게 된 세게 속에 네가 있었다. 너의 묘비가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고고하게 웃으며, “가자.”란 말과 함께 손을 내밀어 줄 것만 같은 네가 이곳에 있다.


“엘리엇―”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역시 대답은…없다. 있을 리가 없다. 불어오는 바람에 뺨 위를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조차 아까워서 눈이 아파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있자 조용히 가야합니다, 라는 빈센트 나이트레이의 말이 재차 들려왔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서야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마지막 말을 하라는 듯, 그 호의에 소리 없이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난 지금부터 너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인 「그」를 맞이하러 갈 거야.


가령 그것이 ‘리오’로서가 아닌 '글렌‘으로서의 목적으로 가야한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네가 알면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라고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난――.


잠시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묘비를 내려다봤다. 황금빛의 알갱이들은 눈부시도록 빛나는 채로 춤을 추며 무덤가에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다. 이런 제 마음에 응하기라도 하듯.


있잖아 엘리엇. 나를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미안해, 리오.」


빈센트 나이트레이가 자신에게 전해줬던 엘리엇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가만히 웃었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차올랐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산산이 부서져버려서 더 이상은 맞이할 수 없는 찬연하고 빛났던 시간을 안타까워하듯.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에 탄식하듯.


아아…끝까지 바보 같았고, 상냥하고 정직했던 나의 주인.


“엘리엇,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할 사람은 나인데. 네가 이렇게 돼버린 건 전부 내 탓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나의 주인님이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있잖아? 너의 시종이어서 난 정말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

난 너를 좋아했어. 정말로 좋아했어.

얼리엇 나이트레이. 나의 고귀한 주인님.

 

판하 카페에서 리퀘 받고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