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데이트Date
2010.12.5. 일요일
10.데이트Date
드디어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대한 애착 따위 없었고, 그 애착 없는 삶을 청부살인이라는 길로 살아왔으니 장수할거라곤 손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이 반갑기까지 했다. 흔히들 말하는 죽음의 공포란 없다. 단지 욱신거리는 상처의 통증과 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기분 나쁠 뿐이다. 무슨 우연인지 가끔씩 마주쳤던 동류에게서 들었던 것처럼 정말 싸이코 일지도 모르겠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그’는 어쨌거나 언제쯤 오려나. 죽긴 죽겠고 후회하거나 나를 찌른 놈을 저주하거나 뭐 그딴 건 없지만, 딱 하나. 오직 딱 하나 바라는 것. 그건 누군가를 만나는 것. 매번 내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앞에 나타났던 그것. 사람의 모습이라는 걸 하고 있어서 놀랍기도 했지만, 그래서 반해버렸다. 어처구니없게도 마음을 뺏겨버린 것이다. ‘그것’에. 흔히들 양지의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는 말로 쓰이는 ‘사신’이라는 것에. 지독하게도 표정이라곤 없는 그 시커멓고 창백한데다가 잿빛 낯을 가지고 다니는 「사신」에게, 시선과 온 마음을 뺏겨버리고 말았다. ……그 덕분에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더 갈구하고 즐겼던 걸지도 모르지. 오직 그때만이 ‘그것’과 만나 짧게나마 데이트를 즐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주 기분 나쁘게도,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람을 죽이고, 내장을 파 해치고, 피를 뿌려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계속 죽이기로 했지. 응.너를 만날때까지.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제발 만났음 하는데….
멍하니, 빛이라고는 달빛밖에 스며들지 않는 다 떨어진 낡은 건물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러온다. 익숙한 냄새. 길게 심호흡을 하며 그 냄새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거창하게들 떠벌리는 ‘안식의 장소’라는 것. 제 부모를 직접 손으로 죽인 자신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관이 어디 있겠는가. 매우 마음에 든다. 음음. 나지막한 탄성 같은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타난 검은 그림자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나타난 순간, 통증이라곤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드디어,
드디어…!
――――――――――아아. 드디어. 드디어 너를 다시 만났어, 나의 사신님.
“……아주…짧…겠지만, 오랜만에, 너와―데이트…라는 걸……해보겠네.”
반가운 마음에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시야가 흐려지려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는 너. 사신님. 이름 따위 모르지만, 내가 멋대로 너에게 붙인 이름이지만. 그래도 너는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오잖아. 봐, 바로 지금처럼. 검은 그림자가 등 뒤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그것’이 바닥에 누워있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숙인다. 그리고 넌 매번 그래왔던 것처럼 손안의 낫으로 죽어가는 자신을 베겠지. 하지만 그 전에, 이 찰나와 같은 데이트의 순간만을 기다려온 내 욕심을 채워보자고?
기계처럼 앞으로 다가와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것’의 얼굴로 힘겹게 두 손을 뻗었다. 두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당장 숨이 넘어 갈 것처럼 힘들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두 손안에 잡혀왔다. 이상하다. 부모란 인간들을 두 손으로 죽이고, 그를 처음 만났던 21년 전에는 그 무엇도 닿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멍해지는 와중해도 신기하단 생각이 든다. 내가 이제 곧 죽으려고 해서 그런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순간 식토를 타고 꿀렁하고 올라오는 피를 왈칵 토해내자 잠깐이나마 눈앞이 똑바로 보여 왔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것’이 보여 온다. 그런 너에게 싱긋 웃으며 붙잡은 얼굴을 자신 쪽으로 잡아끌었다. 감촉이라고는 모르겠던 것이, 입술이 닿자 온기라는 걸 느꼈다. 사납게 웃으며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서 입술을 밀어붙였다. 어차피 몇 분 뒤면 죽어버릴 테니까.
어쩌면 나는 이것을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붉은 피에 젖은 너와의 입맞춤을.
죽음과 함께 즐기는 데이트를.
너를 다시 만나는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