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해]바라마지않는 for. 펭펭님
[노을시화] 바라마지않는
For. 펭펭님
검푸를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적주홍색으로 찢어지듯 물들여지던 그날의 밤하늘이 망막에 맺히듯 어른거릴 때가 간혹 있곤 했다. 망각이 없으니 당연하겠다만…. 애초에 전쟁이란 그리 쉬이 잊혀질 수 있는 종류도 되지 못한다. 눈을 뜨고 바로 앞에 자리한 천정을 멀거니 바라보기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까지도 비참한 비명소리가 처절하리만큼 울릴 것 같으나 주위에 깔리는 건 정적뿐이라. 거기까지 깨달으며 상황을 파악한 노을은 실없이 웃어버리곤 가늘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잔상처럼 남아있는 기억도 없는데 난데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무언가의 꿈이라도 꾼 모양이다. 그것도 제법 오래된 옛 기억을 말이지….
심호흡과 함께 근육을 이완시키기를 반복했을까. 느릿하게 금침에서 몸을 일으키자 풀어놓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앞으로 흘러내린다. 영 부스스하고 엉망인 꼴인지라, 이 모습을 오방신 중 유일한 여성인 여명이 봤더라면 머리꼴이 왜 그 모양이냐면서 당장이라도 빗을 들고 왔을 것이다. 그런 면으로는 섬세한 여인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래 잠들어있기라도 했던 걸까. 모래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입안이 온통 버석버석하게 말라붙다 못해 목마저 쓰라렸으나, 이러기 어디 한두 번도 아닌지라 능숙하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러려니 여기고 만다.
그나저나 난데없기 그지없다. 옛날 기억이라. 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적당히 손빗질로 정리를 하며 왜인고 싶어 감감히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 기억을 뒤집기 시작한지 오래 걸리지 않아 바로 근처에서 어정거리는 이유란 녀석을 잡아채게 됨에 노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요컨대 최근 봉인이 풀린 주인에게 공격당해 입은 부상이 원인인 듯 했다. 달산에서의 그 일로 퍽 많은 이들이 다쳤더랬지. ‘그’ 또한 마찬가지로. 따라 떠오르는 회상에 무의식적으로 사나워지려는 미소를 애써 누그린다. 위험한 고비가 분명 있긴 있었다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치료를 받은 덕에 저나 그나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천년전쟁 이후로 그만한 부상을 입는 건 확실히 오랜만이긴 했다. 요 한동안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은 없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
간단히 머리칼을 한쪽으로 내려묶은 뒤 자유로워진 두 손을 들여다본다. 무엇하나 묻지 않아 깨끗하지만, 과거 이 손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당연한 시기였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손톱 아래의 여린 살 틈까지도 집요하게 들여 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며 시선을 돌렸다. 대체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으나, 답지 않은 감상이 실로 요란하다. 피식 실소를 흘리는데 목의 칼칼함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쨌든 깨어나기도 했으니 목이나 축여볼까 싶어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려고 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던 중 시야로 걸려드는 무언가에 일순 호흡조차 잊고 말았다.
“…허어.”
깨어났을 때부터 어디선가 찬 공기가 스며든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저 잠들기 전에 방문을 덜 닫은 탓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더랬다. ―허나 실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흑과 백, 그리고 잿빛으로 점철된 세상. 시리기 짝이 없는 메마른 겨울의 공기, 눈의 냄새. 마루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라니. 멍하니 바라보다가도 저 이가 누군지를 깨달으며 호흡을 되찾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저리도 골똘히 있는 건가 궁금증이 차오른다.
홀로 있는 저 등을 바라보는 건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었다. 더욱이 모든 것을 혼자 지려고 하는 저 이의 버릇이 나올 때면 더더욱. 그나마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짐을 나누는 방법을 알아가나 했다만, 상황에 내몰려 초조함에 치달으면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단 게 보이는지라 노을으로선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그대답다 여기면서도,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만다.
마치 그날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입술에서 맴도는 희미한 피비린내에 손끝으로 가볍게 입가를 더듬어본다. 어차피 이 또한 착각일 뿐일진데…. 그날은 더없이 어둡고 붉었으나, 지금 그를 품고 있는 세상은 온통 무채색으로만 가득할 따름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사각사각 눈이 쌓이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데, 어찌된 일인지 하얗게 얼어붙어 흩어지는 입김은 보이면서도 숨소리 한 자락조차 걸려들지 않는다. 혹한의 계절 그 한 가운데. 흑과 백으로만 온통 덧그려진 세상 속에 저 이만이 홀로 붉은 선명한 색으로 흔들려서. 홀린 듯 바라보며 시선을 빼앗겨버린다. 마치 눈밭 위로 목이 떨어진 동백꽃처럼. 이 얼마나 덧없고 처연한지….
그의 등을 보는 것을 꺼려하진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만 느껴져 가슴 속이 따끔거린다. 더없이 무거운 짐을 저 홀로 지고 가는 길은 아직까지도 온통 가시밭이다.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고 도와 달라 청해도 좋으련만, 꿋꿋이 버티는 옹고집 하나만큼은 일품인지라 그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고 있다. 그래야만 하는 위치이고, 당연해야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노을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나 정도가 지나치니 그것이 야속하다 느껴버리고 만다. …외로움보다는 서운함이려나. 그래, 그 편이 더 옳을 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본다만 그러면서도 소리를 죽여 불만을 토로해본다.
―대체 그대는 언제까지 홀로 가버릴 생각인고. 이제는 돌아봐줘도 되련만.
느릿하게 금침에서 몸을 일으켜 발소리를 죽인 채 그의 등 뒤로 걸음을 옮겼다. 맨 발바닥 아래로 시린 냉기가 끼쳐들지만 추위보다는 오히려 시원하다 느껴진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들키지 않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만, 예상외로 잠잠하다. 확실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기라도 하는가, 바로 지척으로까지 누군가가 다가와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드문 일. 물론, 노을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그를 빼앗기는 건 마뜩치 않다. 그 누구든, 어떤 것이던 간에―.
“노을?”
툭- 등으로 실려 드는 무게가 느껴지고 나서야 알아차렸는지, 정신을 차린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온다. 그 부름이 기분 좋다. 분명 듣긴 했으나 부러 대답하지 않은 채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져오는 진동을 가만 느껴본다. 야속하고 서운하다 해도, 노을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소리 내 그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 스스로가 타고난 성정인 것도 있다만, 반은 우리들이 그에게 요구했으며 나머지 반은 주위의 환경이 그에게 강요했다. 중앙황제신장이란 그런 위치인 것이다. 잠시 다른 길로 세어, 기대고 있는 이에 비하여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는 작은 제자는 주위에서 내미는 손이 많아 다행이라고 여겨본다. 타고난 복이니 잘됐다 생각하면서도, 그에게는 그런 존재도 되지 못하면서 무어라 잔소리하기란 그야말로 억지다.
…그래도, 결국엔 바라고 만다.
“노을.”
다시금 불러오는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린다. 옆으로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자 반쯤 돌아앉아 저를 보는 이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선명한 보석안을 마주하고 있자니, 뜻 모를 고양감인 차올라 입꼬리가 휘어진다. 아아, 그래. …이 시선을 원했다. 철없는 아이도 아니니 오롯이 제 것이라 주장하고, 사로잡기를 바라 추하게 발버둥치지는 않는다만―간혹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숨 쉴 수조차 없이 간절하게도. 너 홀로 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제 두 손으로 쥐어 붙잡아 끌어당기고, 두 팔 안에 가둬 그 어느 곳도 가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시선으로조차 너를 탐할 수 없이 오직 나만이. 나만을 위해 지독하고 탐욕스럽게 원하고 바란다. 저 역시 저열한 사내인지라 마음 닿는 이를 온전히 손에 넣고 탐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기막힌 합리화를 주장하며 가늘게 웃어버렸다.
그래. 원했다. 원한다. 이토록이나 원한다.
그대를, 너를. 나의――.
“시화.”
“이제야 일어ㄴ…―”
읍-. 말문이 막히는 소리가 겹쳐진 입술 너머로 삼켜지듯 사라져버리고 만다. 당황이라도 한 모양인가, 황홀한 보석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다. 소리 내 말했다간 분명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보이겠다만, 지금으로선 그런 말을 해주고 반응을 구경할 틈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급하다면 당장 이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라서. 피하려는 듯 반대편으로 돌아가려는 턱을 한 손으로 단단히 잡아 고정하고, 마저 다른 한 손으로 어깨마저 붙잡았을 것이다. 억누르는 힘에 반발하는 듯 몸을 뒤틀려 하는 시화였으나,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서서히 마루 위로 쓰러트리듯 눕혔을 때서야 반항하던 움직임은 겨우 조금 잦아든다. 예민한 입안을 훑고 누르면서 도망가려는 살덩어리를 휘감아 빨아 당기자 낮은 목 울림이 흘러나온다. 그 소리가 귀여워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며 희롱한다.
한참을 무언의 밀어내고 밀어붙이는 씨름이 오갔을까. 이내 어깨를 밀어내던 손에 힘이 빠지고, 대신 두 팔이 목에 감겨왔을 때서야 노을은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하리만큼 매달리듯 입 맞추던 것이 언제였단 것처럼 떨어지자 제법 못마땅하다는 시선이 꽂혀든다.
“…이제야 일어난 거냐고 물을 틈은 좀 주지 않겠어요, 노을?”
“잘 일어났으니 이러고 있지 않겠는가.”
“얼마나 누워있었는지는 기억 하나요?”
“음. 대략 이틀?”
“생각보다 구체적인 숫자인데요.”
“광휘가 치료해줬었으니까.”
말끔하게 치료가 된 덕에 그리 오래 걸릴 거라곤 생각 안했다만 말일세. 뻔뻔하게 굴자 닿아오는 시선엔 언뜻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일일이 다 알아차리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범위란 한정되어 있고, 눈앞의 상대는 실로 오래 함께한 이기에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만 않다. 지금만 하더라도. 정말 이틀이냐고 물어보니 대략 그 정도인 것 같네요. 정확히는 만 하루지만요. 라는 대답이 순순히 돌아온다.
“그럼 날 기다린 건가, 자네?”
“글쎄요…. 어떨 것 같나요.”
“허―.”
답지 않게 떠보는 말투가 의외라면 의외라. 묶지 않은 금빛 실타래 같은 머리칼이 회갈색으로 물들여진 마루 위에 흩어져 반짝거린다. 녹아내릴 듯, 선명한 빛깔이라. 그에 홀리듯 내려 보다 솔직한 감상을 내려놓았다.
“꽤나 기다리게 한 모양이지. 투정도 다 보는군.”
“…투정이라니.”
애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 대답을 하면서도 민망하단 표정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곡인 모양이다. 큭큭, 목으로 소리를 죽여 웃자 눈매까지 샐쭉거리는 시화다. 이것 참. 이리도 솔직해서야. 모르는 척 넘어가려 해도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얼굴 옆으로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뺨을 감싸자 시린 기운이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막 깨어난 탓에 제가 따뜻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뺨이 차갑게 얼어 있는 건 분명했다. 닿아온 손의 온기가 기분 좋기라도 한 건지 가만히 눈을 감고 기대듯 고개를 기울여오는 시화를 내려다보며 갸웃거렸다.
“날도 추운데 왜 여 나와 있나. 들어와 있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어서 잠시 보고 있었어요.”
“흐음. 잠시라. 나쁘진 않다만….”
답지 않다는 뒷말이 있었다만 부러 말끝을 흐렸다. 내뱉어 봤자 쓸데없는 근심만 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느냐 또한 묻고 싶다만 역시 괜히 들쑤셔봤자 좋을 건 없을 터다. 본인도 꽤 복잡하게 생각하는 같으니, 스스로 말해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겠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 넘기려는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거리다 도로 입술을 닫는 시화의 행동에 시선을 기울였다.
“그러는 노을이야 말로.”
“음?”
“……. …됐습니다.”
“왜 말을 하다 마는가. 그러면 묻고 싶어지는데 말이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알고 있을 듯 하니 말이죠.”
“무얼?”
“…….”
“욕정하느냐고?”
“…아니, 저기. 노을.”
거침없는 직구에 웃고 있는 얼굴 위로 미세한 금이 간다. 미세하다 하더라도 노을이 보기엔 제법 큰 균열이다. 농이랍시고 던져본 건데 당황한 티가 역력해서, 그런 시화를 보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며 결국 다시 그의 위로 몸을 낮추게 된다. 스스로 말 한 것 그대로, 차마 없었다고는 말 못하리라. 그래도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만족하려고 한 것은 있었다만 이래선 그냥 넘기고픈 마음도 가신다. 이게 전부다 저를 부채질 한 그가 잘못한 것이라는 기막힌 탓을 하며 그에게로 화살을 돌린다.
“농이었는데 말일세.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겠고.”
“…너무하네요.”
“정말로?”
“…글쎄요.”
가깝게 좁혀진 얼굴 사이로 서로가 내쉬는 숨결이 겹치듯 흩어진다. 찬 공기에 어느덧 온기가 식었지만 추위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무어든 좋으니 어서 말해보란 것처럼 상대에게 종용하며 눈싸움을 하듯 물끄러미 들여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고 있는 자신들의 꼴이 우습다는 걸 깨닫기 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결국엔 맥없이 웃어버리고 만다. …뭐, 어느 쪽이든 어떻겠는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는 순간을 맞이하게 됐거늘.
02/16
많이 늦었습니다. 생일 축하드려요 펭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