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그 시작은
※날조주의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인간 여자여.”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잠을 청했다가, 무심코 눈을 떠보니 영역은 온통 눈부신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드문 일인지고. 감탄을 흘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잿빛 아니면 붉은빛을 띤 구름으로 꽉 끼어있기가 일쑤였던 영역이 아니었던가. 나른하게 남아있는 몽롱함이 나쁘지 않아 다시 눈을 감을까 했으나, 왕은 몸을 일으키며 잠을 떨쳐냈다.
비행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날씨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난 이후 영역의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날개를 펼쳐들었다. 하지만 드물었던 만큼 변하는 것 또한 순식간이다. 어느덧 몰려든 두꺼운 구름에 하늘은 물론이고 산맥까지 온통 잿빛으로 바래졌다. 온통 인상 쓴 구름 너머로 천수의 난폭한 울음소리가 예 지상까지 들려온다. 불어오는 바람의 괴팍한 성질을 보아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감한다.
먼 듯 희미하던 비 냄새가 점점 짙어져만 간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날씨를 온 몸으로 예감하는 황금빛 두 눈이 투명한 검은 비늘 아래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비가 내릴 것을 본능으로 알아챘는지 와이번들의 울음소리가 따갑도록 협곡 사이에 울린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금안과, 찬란한 보석안의 중앙에 세로로 길게 박힌 흑요석 같은 동공은 눈앞의 미천한 생명을 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왕이 바라보던 개체는 둘이 되었고 가장 먼저 발견했던 첫 번째는 그렇게 숨을 거뒀다. 그것의 호흡이 멈춰진 순간, 동시라 하더라도 틀림없을 정도로 빗방울이 비늘 위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다.
톡-. 톡톡톡--. 투두두둑---.
점점 소리를 바꿔가는 그것은 잔망스럽고 어딘가 서글프다.
황혼자락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 온 세상을 품어버린 밤의 색을 띈 투명한 비늘이 젖어든다. 문을 두드리듯 떨어지던 물방울은 잠시 후 수천, 수만 개가 되어 빽빽한 협곡과 왕의 몸체를 적셨다. 갑작스러운 폭우였으나 강한 바람까지 동행해 몰아치는 것을 봐선 아마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협곡에선 언제나 있는 일이기에 이 정도는 훤히 할 수 있다. 제법 난폭하게 불어오는 비바람을 온몸을 맞으면서도 왕은 아랑곳 하지도 않고 여전히 앉아있던 자리를 지켰다.
딱히 비바람 막이가 되어주겠단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 내려앉았던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던 것뿐인데, 이제는 막아줘야 하는 이유란 것이 생겨버렸다. 특성상 태초부터 함께 해온 「동족」에 비해 불안정한 영혼을 가졌기에 터무니없이 약하나, 엄연히 한 종족을 이끌고 있는 세 왕 중 하나다. 그런 자신을 비바람 막이로 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타고난 행운인가.
이젠 죽어버린 이에게 따라붙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미의 목숨과 맞바꿔 태어난 저 인간의 운인 것인가?
왕은 말끄러미 핏빛 천 덩어리를 바라봤다. 방금 막 숨을 멈춰버린 인간의 시체-한 짝밖에 남지 않은 팔과 가슴 품속에 붉은 비단으로 지어진 강보로 쌓여있는 갓 태어난 그것은 아직 첫 울음소리조차 채 내지 못하고 있다.
왕이 발견했을 때, 어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도 못하면서 안간힘을 써 다리 사이로 생명을 내보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황이나 왕은 무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피비린내가 비 특유의 물비린내와 뒤섞여 동굴 내부에 진동한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흐느끼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도 잠시였다. 힘없는 숨결마저 하얗게 얼려버리는 시린 추위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은 어미가 바닥을 기다시피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꾼다. 연약한 피부가 돌바닥에 쓸려 상처가 나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튼 어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다리 사이로 배출되듯 나온 아이의 배―아직 어미와 연결되어 있는 생명줄을 끊는 것이다.
얼마나 낑낑거렸는지는 모르겠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빨 사이에 끼워 갈고 잡아 뜯고를 반복해 탯줄을 끊어낸다. 피비린내가 역해 욱욱 헛구역질을 반복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어미의 행위는 엄청난 집념에 가까웠다. 이미 한계점을 넘어선지 오래였으나 어미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어째서 저리도 움직이는 것일까. 그것이 신기하기까지 해, 원래대로라면 흥미를 잃고 돌아섰을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었다.
참으로 처절하고, 어리석고, 가엽고, 불쌍한 종족이로다.
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저 처참한 모습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죽어가는 도중에도 끝없이 타오르는 강한 의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한 주제에 품고 있는 강한 의지는 시선을 매료시킨다. 긴 꼬리를 그리며 타들어 사라져버리는 유성과도 같은 강렬함을 닮은 탓인가…? 일렁이는 감정이 낯설다 여기며 왕은 끝까지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어미는 여전히 눈앞의 위대한 존재를 두고서도 오직 제 새끼만을 볼 뿐이다.
발작을 일으키듯 덜덜덜 떨면서도 찢어져 덜렁거리는 제 옷자락을 뜯어내 그것으로 아이의 몸을 둘둘 감쌌다. 마지막으로 어미는 팔에 제 새끼를 끌어안아 품에 안아보며 한번 얼굴을 보듬더니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주 작은 단어. 이름은 아니다. 짧은 전언이고, 지금 같은 순간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기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멀쩡한 두 팔에 꼭 안으며 했을 것이다. 바래왔던 꿈과는 달리 죽어가고 있었으나 어미는 꿋꿋이 자신의 마음을 아이에게 그리 속삭였고,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한낱 짐승이나 몬스터보다도 더 복잡하고 기괴한 장기들을 뱃속에 품고 있는 몸뚱어리는 싸늘하게 식어간다. 연약한 육체를 안락하게 눕히기 위해 만든 가구 위도 아닌 동굴의 맨 돌바닥 위니 사그라지는 속도는 빠르다. 저를 품고 있는 어미의 몸이 굳어가는 걸 알아챈 걸까. 본능에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광폭한 빗소리와 죽어버린 시체, 방관자의 침묵만이 빙글빙글 맴돌던 동굴에, 아주 희미하게 인간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터졌다.
맹렬하고, 가련하고 안타까운 울부짖음이다. 그를 들으며 왕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깊은 해저에서 올라오는 신기한 소리를 닮은 그건 동굴 내부를 돌고 돌다가 멀리 협곡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으며 사라졌다. 탄식에서 우러나오는 감상이라. 도대체 이것이 얼마만인가.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도 한꺼번에 많은 감정을 느껴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단언할 수 있다. 한숨을 끝맺고 왕은 두 눈을 깜빡였다. 미묘한 감상을 품으며 단단하고 날카로운 발톱보다도 더 작은 생명을 바라봤다. 다시금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죽어가던 와중에도 소원을 바라는 간절함을 보았다. 그렇기에 왕은 어리석다 여겼다.
살아주길 바랐다 한들 이곳은 태초의 종족들의 지배하에 놓인 영역이다. 함부로 다른 종족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몬스터들을 끌어 모아 영역 내에 풀어놨다. 험악한 산체와 협곡이 빽빽하게 이어지고 있기에, 처음 풀어놨던 몬스터들 중에서 경쟁에 밀린 약한 것은 외각으로 밀려나고 강한 것들만이 남아있다. 어느 지역보다도 가장 사나운 것들만이 득실거리는 이곳은 인간으로선 절대 발을 들여선 안 되는 금지된 땅이다.
희미한 것 같지만 피 냄새는 동굴 주변에 가득 퍼져 물안개처럼 깔린 지 오래다. 비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것을 예민한 몬스터들이 놓칠 리 없다. 둘러보지 않더라도 몰려든 그것들의 기척에 왕은 귀찮음을 느끼며 가볍게 날개를 펼쳤다 다시 접었다. 그 움직임에 몬스터들이 주춤 물러섰지만, 단 과실에 벌레가 꼬이듯 다시 슬금슬금 몰려든다.
저것들은 꽤 오래전부터 이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신 때문이다. 죽어버린 어미가 쳐 놓았던 결계를 의도치 않게 망가뜨리다 못해 짓밟아 깨트려버렸다. 이곳을 떠나면 저것들은 몬스터들의 밥이 되겠지.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 갓 태어난 인간의 아이가 이곳에서 홀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강렬하던 아기의 울음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약해져 가더니 이윽고 침묵한다. 어느덧 빗소리를 제외한 협곡은 온통 고요해졌다. 찰나, 우우웅- 하는 거대한 소리가 밀려든다. 생명의 동굴 쪽에서부터 시작된 포효가 이곳까지 울려왔다.
세 왕 중 하나인 마룡이 저 소리의 주인이다.
온 협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몬스터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파드득거리는 날개 짓의 소음이 소란스럽다. 몬스터들은 이토록 난동인데 아기는 침묵한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거나, 들었다 하더라도 울부짖을 힘조차 없는 것이겠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오만함에 그것을 들은 왕의 심기 또한 그처럼 뒤틀어졌다. 지금까지 마룡이 무엇을 먹이 삼고 어찌 취급해오지간에 방관해왔었다. 허나, 그는 정도라는 것을 지나치게 넘어섰다.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는 보통 인간들이라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법한 그런 처참한 모습이다. 저런 몸으로 마룡에게서 도망쳐 나와 제 새끼까지 낳았다. 단순히 집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시체를 바라보는 왕의 금안으로는 감탄과 불쾌함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불쾌한 감정의 화살 끝은 여전히 들려오는 포효의 주인을 향한다. 먹지도 않은 채 반항하는 것을 순순히 놓아줄 것이면 어째서 사냥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찮은 종족일지언정 그들이 지닌 생명마저 하찮지 않다. 그러나 돌연변이로 탄생하여 한 종족의 왕이 된 마룡은 태초로부터 이어져오던 불문율의 계약을 무자비로 깨뜨리고 있다.
이미 세상은 전란이다. 거대한 폭풍전야 속에 들어선 것을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끝없는 혼돈이 몰아치고 있는 난잡함에 끝없는 흉포함까지 뒤섞이겠지. 오래전부터 내다보았던 미래는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간다. 단,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분명 다르게 그려지는 확신.
으에에엥-
인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처음과는 달리 가느다란 그 소리는 당장이라도 끊어질듯 위태롭다. 너무 위태로워서 왕은 그것이 듣기 괴롭다고 느꼈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있고, 살아가겠단 의지로 울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대로 놔두면 분명히 죽겠지.
죽는 것을 지켜볼까. 그것도 아니면――. 금안이 일렁이는 지혜에 번들거린다.
왕은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어미가 없고 보호해줄 이들이 없는 연약한 것은 금방 죽기 마련이다. 그러다 죽어가는 인간을 발견하고 새로이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됐다. 왕이 이곳을 지나가다 발견한건 단순한 우연에 불과했다. 협곡의 바위 틈새로 만들어진 동굴. 보통 인간은 들어올 리 없는 장소였으나 그 앞에 둘러쳐진 그네들이 사용하는 가공된 마력의 운용에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갔을 뿐이다.
아무리 혜안을 가지고 있다한들 자신의 미래나 혹은 같은 자들의 미래는 무척 단순하게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나마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이 정도다. 보통은 안개가 들어찬 듯 온통 뿌옇기에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다. 눈앞의 어린생명 또한 마찬가지다. 유성보다도 더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종족의 아이. 보통의 인간들보다 더 짧게 살 운명이겠거니 싶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미래는 있으나 그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다. 애초에 일찍 죽어버릴 목숨이라면 무언가가 보인다거나 하는 일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직 자신을 포함한 세 왕 뿐이다. ―그렇다는 건 이 아이 또한 왕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훗. 희미한 웃음소리가 코끝으로 흩어졌다. 당장 죽을 듯 간당간당한 인간의 아이를 두고, 왕의 운명이라 운운하다니. 신목에서 잠들어 있는 위대한 왕이 알면 분명 유쾌하게 웃을 일이다. 듣도 보도 못했던 유희거리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왕 역시 스스로가 우스웠으니 말이 필요할까. 허나, 분명한 사실임은 틀림없다. 즐거운 듯 가늘게 휘었던 눈을 뜨며 왕은 몸을 낮춘 뒤, 조심스럽게 발톱으로 강보를 들춰냈다. 갓 태어났음을 알리듯 핏덩이가 꼬물거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을 바로 보는 것이란 굉장히 드물기에 왕으로선 나름 호기심이라는 것을 품었다. 제대로 닦아주지도 못하고 체온을 유지시키는데 급급해 탯줄을 끊자마자 강보로 둘둘 둘러싸버린 어미로 인하여 아기는 덕지덕지 말라붙은 양수와 피로 엉망진창이다. 게다가 시들어버린 열매마냥 쪼글쪼글한 피부는 매우 붉다. 인간이란 참으로 못나고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연약한 흰빛 피부로 변하고 통통히 살이 오르는 건가.
-아이야.
“…으엥….”
-인간의 아이야….
살고 싶으냐. 깊은 심해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낮고도 신비한 목소리로 왕은 작은 인간의 아기에게 물었다.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자여. 연약하고 가련하며 안타깝기가 그지없는 인간이여. 살고 싶으냐. 살아가고 싶은 게냐.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은 그리 물음을 던졌다. 깊은 금안이 검은 비늘 아래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자신의 선택은 과연 운명의 여신이 자아내는 시간의 금빛 날실일까, 생명의 자색 씨실일까. 어떤 선택이든 간에 모든 것은 여신이 짜놓은 화려하고 눈부신 융단의 문양대로 이뤄질 터이니…. 들춰냈던 강보를 조심스럽게 다시 덮은 후 아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강보의 양끝을 단단히 물어 올렸다. 자리를 완전히 뜨기 전, 차갑게 식어버린 인간의 몸뚱어리를 보았다.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자다. 무생물이 되어버릴 바엔 다른 생명들의 피와 살이 되어주는 편이 훨씬 의미 있는 마지막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왕은 무심히 눈길을 돌렸다. 자, 모든 것을 ‘선택’했으니 이만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천천히 다가오는 시간에 답지 않은 조급함을 느끼며 왕은 얇으나 거대한 피막의 날개를 펼쳤다. 온통 잿빛 세상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흑요석의 몸체가 천천히, 가볍게 하늘을 날아올랐다. 이후, 왕이 인간의 아이와 함께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미나르 숲 전역을 수호하는―위대한 세 왕 중 한명이 잠들어 있는 신목神木이 있는 성역聖域이었다.
-어리석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동족에게서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이러했다. 그의 말에 혜안의 왕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협곡에서 곧장 온 길이기에 단단하고 긴 주둥이 끝에는 여전히 붉은 강보를 물고 있다. 한편, 반대로 그에게 어리석다 말했던 왕은 성역으로 찾아온 동족을 바라보며 불꽃보다도 강렬하고 보석보다도 찬란한 적안을 가늘게 흘겨 떴다.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경험해 볼 수 없던 의외의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이렇게 놀라웠던 건 용의 협곡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영역의 터를 잡은 또 하나의 왕이 탄생했을 때 이후 처음이다.
실로 깊은 잠이었다. 무의미안 안식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아직까지도 잠속에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었어야 했으나, 나락에 다다를 정도로 깊숙이 떨어진 자신의 의식을 잡아 이끈 건 신목의 찬연하고도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그녀’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눈을 떠 보게 된 성역은 잠들기 이전처럼 변함없었다. 청명한 하늘과 따스한 햇살과 저를 품고 있는 부드러운 녹빛 요람은 전부 그대로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름다운 속삭임이었기에 신목의 품에 안긴 채 긴 잠속에서 깨어난 왕은 무척 기분 좋았다. 온 몸을 감도는 나른함이 싫지 않아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요람에 다시 긴 목을 뉘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 가히 수백 년만. 오랜만이라는 관용어를 떠올릴 만큼 반가웠고 그만큼 의문스러웠다. 자신과 함께 긴 침묵을 지키며 잠든 이였다. 헌데 어쩐 징조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미나르 숲과 용의 산맥 전역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왕이 기억하기로는 매우 드문 일이다. 바람의 소리를 닮은 그 신비한 노래가 끝나갈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혜안의 왕이 찾아왔다. 인간의 아이와 함께.
불쾌함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아이러니함이다. 그를 만나는 것 또한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만큼 무척 오랜만이다. 그와의 만남이 반가울 법하나, 마냥 그럴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데려온 인간의 아이 탓이다. 그것을 감싸 안고 있는 붉은 강보를 아슬아슬하게 물고 있는 벗은 자신이 탄생하던 순간 함께 창조되었던 동족이었다.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혜안을 지닌 현명한 왕. 그런 자의 선택이라곤 믿기지 않아 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이는 이런 선택을 섣불리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동족은 자신의 선택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려 한다. 그저 엊그제만 같거늘 이리도 시간이 오래 지났단 말인가…?
-그 인간을 살리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겠다?
-아니지.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대의 선택은 실로 어리석다. 오닉스 드래곤의 왕―아프리엔이여. 오랜 형제여.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건가?
-물론이다. 나인스피릿.
태연히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나기까지 해서 왕으로선 심기가 아주 조금, 불편해졌다. 못마땅해 하는 벗의 의외의 모습에 혜안의 왕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기에, 난 ‘그녀’에게 이름을 받고자 왔다. 언젠가 나의 「마스터」가 될 인간의 이름을.
‘마스터’란 말이 나옴과 동시에 생명과 신목의 수호를 맡고 있는 세 왕 중 하나인 나인스피릿을 기어코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감히 인간 따위가 드래곤 왕의 마스터가 된단 말인가! 낮게 가라앉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노기를 담고 있다. 와이번이라도 당장 거품을 물며 기절할 법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지만, 왕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아기는 경기 한번 일으키지 않고 곱게 잠들어 있을 뿐이다. 강보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점점 더 사나워진다. 나인스피릿. 나지막하게 왕의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그대답지 않다. 벗의 말을 들으며 고룡은 천천히 따스한 빛깔의 요람에서 뉘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왕의 몸체가 무척이나 작아 보일 만큼 거대한 신목은 그의 움직임에 가볍게 가지를 흔들어줄 뿐이다. 기지개를 펴듯 핏빛의 얇은 피막을 펼치며 왕은 붉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아프리엔.
-후후….
오죽 답답하다 여겼으면 이리 말할까. 그는 여전히 웃는다.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 답답함마저 몰려왔다. 태초로부터 계속해 축적 되어온 지식 속에서도 이를 해결할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역대 오닉스의 왕들 중 자신의 계약자로 인간을 선택한 자는 없었다. 애초에 서로에게 허락된 시간자체가 다르지 않는가.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나, 영원을 사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의 때에 도달하면 분명 한줌의 재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해 이 세상에 녹아들 것이다. 허나 그 전까지는 매우 길고도 긴 생을 살아가며 혼돈 속에서 ‘조율자’의 역할을 수행하겠지. 그것이 자신들이, 정확히는 ‘자신’이 신과 맺은 「맹약」이다.
허나 눈앞의 오닉스 드래곤은 그 맹약에 깊이 얽매어있지 않다 : 탄생부터의 불완전함을 택했기에. 또 한명의 ‘조율자’이나, 완전함을 포기한 대신 그들이 신에게서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선택의 자유였다. 강함도, 약함도, 삶도, 하물며 스스로의 죽음조차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자신과는 분명히 다른 점. 이러한 이유로 저들은 이젠 셋이 된 왕들 중 유일하게 탄생과 죽음을 반복해오고 있었다. 선대의 지식과 기억은 신목을 통해 다음 대의 왕에게로 이어지지만, 자신과 함께했던 벗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영원이란 건 없기에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자신들에게 또한 변화란 계속해서 찾아온다. 태초부터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벗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단 둘 뿐이었던 왕은 어느덧 셋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벗이 사라진 이후 그저 ‘동족’이라는 틀 뿐이었던 종족에게서 드디어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이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것을 매우 기쁘게 여겼던 모양이다. 유성보다도 짧은 생을 살아가는 종족과 목숨을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는 벗이 야속하다 느끼는 것을 보아하니…. 감정의 수면이 흔들리자 저를 바라보던 벗의 표정이 조금은 변한다. 그 마음을 느끼며 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훅- 내쉬는 숨결이 몸 아래의 나뭇잎에 닿는 순간 멈춰있던 노래가 다시금 시작됐다. 아니, 노래라고는 부를 수 없는 거대한 「소리」가 성역을 휩쓸었다.
-……….
-……….
또다시 울려 퍼지는 소리에 두 왕은 침묵을 지켰다.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이윽고 의지가 담긴 「소리」에 푸른 「숲」이 반응하며 전 지역으로 소리가 뻗어나간다. 온 몸이 휩쓸려버릴 듯 거대하나, 귓가로 속살거려오는 그것은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창詠唱이다. 비늘 아래로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가라앉았다. 그곳에 담겨진 의지에 생명의 왕은 두 눈을 감았고, 혜안의 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이 웃었다. ‘소리’에 휩쓸려 불어오는 바람에 어린 나뭇잎들과 새하얀 꽃잎이 팔랑팔랑 흩날린다. 부드럽게 쏟아지는 잎사귀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왕은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런 이름인건가…. 두 왕은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매우 흡족하기까지 한 그런 이름이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온 왕은 두 금안 위로 기쁨을 띄웠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옴에 생명의 왕은 노기를 누그러뜨리며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호수의 수면위로는 바람 한점 없이 거울처럼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그녀’의 뜻이 그러하다면 자신으로선 막을 수 없으니…. 이미 그녀는 하찮은 생명에게 이름을 친히 선물해주었다. 아니, 신목의 축복을 받은 이를 감히 하찮다고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저 벗을 잃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렇기에 왕은 여타 다른 종족들이 그러하듯 미련한 말을 고집스럽게 내뱉었다.
-인간의 아이가 성년이 되기까진 20년이었던가. 짧지만 충분한 시간이겠지…. 부디 그 동안 마음을 바꿔주길 바란다, 아프리엔.
-그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나인스피릿. 내 결정엔 변함은 없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왕은 접어뒀던 피막을 펼쳐들었다. 그리곤 잊지 않고 신목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다. 최고의 예를 다하며 감사를 표한 왕은 처음 아이를 데려왔을 때처럼 유유히 날아오르며 하늘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우아하며 아름다운 모습이다. 생명의 왕은, 그저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적안 가득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깨끗한 하늘로 사라져가는 이가 한 점이 될 때까지 바라봤을까.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즈음에서야 왕은 천천히 녹빛 요람위로 다시 몸을 뉘었다. 쏴아아- 나뭇잎이 이는 소리가 소란하다. 귓가에서 키득거리던 장난스런 웃음소리는 상냥한 자장가로 변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꼭 어루만지는 손길처럼 보드랍다. 얼음과 눈이 녹아내리듯 언짢던 기분을 서서히 풀어가며 왕은 긴 한숨을 내쉬어Te. 20년이라. 혜안의 왕에게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참으로 별거 아닌 짧은 시간일진데 참으로 느리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전에 썼던 글을 발굴. 백업할겸.
아프리엔과 프리드가 어떻게 만났을까 망상질 하다가 끄적끄적이었지만
실상은 용왕님들 덕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