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탑]가장 소중한….
> 「아침에게 인사해」에서 이어집니다.
For. 깜님
눈을 뜨니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여져 있었다. 유리창에 난반사되며 부서지는 빛은 방안 가득히 스며들더니, 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아무런 감촉도 없을 진데, 보드랍다는 느낌이 들어 무척 신기했다.
탑에 들어와 처음으로 본 빛에 대한 감상은 무척 단순했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환한 세상 속.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빛은 시리도록 새하얗고, 눈이 부셨다.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빛을 막고자 손을 들었을 때, 손끝이 붉게 물들여지던 것을 처음 봤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또렷해서….
그건 지금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을 텐데, 어제의 아침과는 어딘가가 달라 보여서 몇 번이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처음 하늘을 처음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때처럼 가슴속이 술렁술렁- 소란스럽다. 스물스물 번져 들어오는 빛을 한참 보고 있었을까. 빛이 따스해 기분 좋다는 감상을 나열하다가, 깨어나기 이전부터 고막을 때리듯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덩달아 몸을 눌러오는 무게까지 한꺼번에 느껴져서 숨이 막혔다.
“……음.”
숨이 막히기까지 해서 낮은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커다란 머리가 보여 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움직임이 무척 안정적이다. 이게 대체 뭘까…? 의문을 가지기도 잠시,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머리를 깨우며 한참을 바라봤을 때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하는 소리 없는 탄성이 벌어진 입을 통해 빠끔거리고 나왔다. …라크 씨다. 제 소중한 친구들…. 평화롭게 잠들어있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무거워.’라는 말을 애써 삼키면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남아있는 졸음이 아쉽긴 했지만 이미 깨버렸으니 어쩌겠느니, 하며 미련을 접기로 했다. 다시 잠을 이루기엔 그른 것 같다. 라우뢰 씨라면 아마 가능한 일일지도 하는 생각을 삼켰다. 제 베개는 저만치 두고서 여기까지 굴러와 자고 있는 라크를 보다가 끙, 앓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니 겨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불쑥 제 움직임에 깨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는 것처럼 라크는 벌리고 입을 한 번 다시는 것 말고는 계속해서 잠을 즐길 뿐이다.
드르렁-, 쿠우우-, 반복되는 코골음 소리는 일어나기 전과 변함없이 요란스러웠지만 그게 꼭 싫게만 들리진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오히려 반가움에 가까웠다. 적어도 왕난 씨들과 함께 팀을 이뤄 올라오기 전까진 숨 막힐 것 같은 고요 속에서 홀로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숙하다 못해 기이하도록 깊게 가라앉은 적요의 아침은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눈부셨었고, 그 정적이 제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아서 진저리를 치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일쑤였다. 그러니까, 이 소음이 싫지 않았다. …싫어할 리가 없다.
모로 누운 채 여전히 자고 있는 라크를 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밤에 이 방에서 잠들었던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라크 레크레이셔와 스물다섯 번 째 밤, 그리고 쿤 아게로 아그니스. 탑에 들어와 만났고, 제게 호의를 가지며 손을 내밀어줬던 ‘첫 번째 친구’였다. 라크의 코골음이 장난이 아닌데도 진즉 이골이 난 사람처럼, 쿤은 이불로 몸을 둘둘 둘러 싸매고 엎드린 채 여전히 자고 있었다. 베개를 끌어안다 못해 얼굴까지 꾹 묻고 자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상시 모습과는 좀처럼 매치가 되지 않아서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꾹 눌러 참았다.
그세 여기까지 들어온 옅은 아침빛살이 푸른빛이 맴도는 그의 은발 위를 노닐고 있었다. 만지면 파스스 녹아 사라져 버릴 것처럼 하얗게 반짝거리는 것이 무척 예뻐서, 쉬이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빛을 피해서 도망치기라도 한 걸까. 커튼이라도 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벽의 한 면엔 커다란 유리창만이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는 게 전부다. 유리창 안으로는 평온한 정경이 가득 담겨져 있고, 아득히 멀리서-사람들이 떠드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뭔 일인지 큰소리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도 섞여있다. 벌써들 일어났나 보다. 일찍 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늦잠이었던 건가?
고요하고 소란스러운 아침을 맞이하면서 스물다섯 번 째 밤은 천천히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혀가 말라서 잘 움직여지진 않았지만 소리를 내기에 무리는 없었다. 잠들기 이전부터 끊임없이 깨닫고 있던 사실을 부러 소리 내 읊기까지 했지만 현실감이 없긴 여전했다. 꼭 꿈을 꾸는 기분이라 아직도 쉬이 믿겨지지 않았다. 청량한 파란 빛으로 너울거리는 창밖을 보다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돌아왔다. 몽롱한 머릿속을 완전히 깨울 겸 지금의 상황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단순한 행위였지만 그 의미는 제게 있어선 제법 중했다. 아아, 그래. 돌아온 거다. 돌아왔어…. 똑같은 말만 반복할 줄 아는 인형처럼 끊임없이 되뇌었다. 코를 골던 라크가 입을 다물더니 잠꼬대를 하듯 우물거릴 때까지 반복되던 행위는 한숨으로 끝을 맺게 됐다. 한숨을 내쉬면서 밤은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날 이후로, 혹시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망상을 간혹 하곤 했다. 현실이 괴로워서, 도망친다고 선택한 것이 물속에 고개를 처박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약해져서 아이처럼 현실을 외면할 때면,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꿈을 꾸게 됐다.
―그토록 길었던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다.
무겁고 답답하던 목덜미가 허전해진 것이 이상해서, 더듬듯 만지다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그리운 얼굴들이 제 앞에 있었다. 라크 씨, 이수 씨, 하츠 씨, 엔도르시 씨와 도…아낙 씨, 라우뢰 씨도…. 한명, 한명 차례로 나타나서는 즐거운 소란을 일으켰다. 오늘 수업도 참 지루했지, 피곤해, 졸려, 배고프다-식당이나 갈까? 식당 밥 맛없어, 밖에 나갈까, 나가긴 어딜 나가? 별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정겹게 들려왔다. 오가는 대화도, 주위의 풍경과 사물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꼭 2층에서 지냈던 그 시간이 떠올라서…. 얼떨떨한 얼굴로 보고만 있자, 어느새 왔는지 변함없이 상냥하게 웃고 있는 쿤 씨가 저를 부르며 손을 내밀어왔다.
「뭘 그리 멍하니 있어, 밤? 이쪽으로 와.」 하고.
……그토록 달콤한 부름이라니. 그건 마치 지금껏 네가 봐오고 겪었던 일들은 모두 꿈이란다, 하고 속삭여오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를 똑똑히 들으면서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지금껏 일들이 모두 꿈이거나 허상일 리가 없었다. 아프고 괴로웠던 시간들이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어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가 부르는 데도 불구하고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데굴데굴 굴리며 망설임을 집어삼키는데 그런 저가 답답했나보다. 왜 그러냐는 것처럼 그가 내밀었던 손을 가볍게 털면서 어서, 하고 불러왔다. 그에 고개를 들다가, 제 손을 보고 있었단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언제? 하면서도 시선을 들어 올리자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색의 예쁜 눈동자는, 지금껏 기억으로만 그려왔던 것과 꼭 같아 있었다. 쿤 씨뿐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이들이 저를 보며 기다리고 있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무언가가 빠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있어 그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밤, 뭐하는 거야? 안 오면 두고 가버린다? 장난스럽게 깔깔 웃으면서 이리오란 양 손짓을 한다. 여전히 아닐 것이라고 부정을 반복했지만, 혹시나 하고 비집고 나왔던 기대는 마음을 순식간에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소란스럽고 복잡한 틈을 타 누군가가 속삭여왔다. 꿈이 아니라고. 저 손을 잡으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러면 분명 기다렸단 것처럼 맞잡아줄 것이라고….
「밤.」
부르는 목소리가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주던 마지노선을 손쉽게 무너뜨려버렸다. 상냥한 부름을 못 이겨, 홀려버린 것처럼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불안함은 여전해서 뻗는 도중에도 손가락을 움츠리며 주저하면서도 저 손에 닿고자 소원했다. 너무 새하얘서 손으로 건들면 사르르 녹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누구보다도 굉장히 따뜻했던 손이었다. 그 온기는 아직까지도 선연했다. 함께 탑을 올라가자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의 손을 잡았었다. 손안에 들어온 온기는 무척 따뜻했고, 굉장히 기분 좋았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더 그 온기에 닿을 수 있기를….
찰나였다. 손이 닿기 바로 직전의 순간이었다. ‘잡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원하던 것이 이뤄지기 바로 직전, 온 세상이 왈칵 뒤집혀졌다. 확 끓어오른 물거품이 터져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리는 시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럽다 못해 멀미까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욱, 하는 헛구역질 소리를 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차 하면서 번쩍 다시 떴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새까맣고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은 뒤였다.
믿겨지지 않아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제 앞에 있던 이들의 모습을 찾고자 애썼지만, 누구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있다가 제 손을 들어 올리며 안을 들여다봤다. 세상이 뒤집히기 그 직전까지도 웃고 있던 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내밀었던 손에 제 손이 닿았던가? 서서히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손끝의 감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분명, 잡았던 것 같았는데…. 아무리 집요하게 굴더라도 남아있는 건 끝내 없어서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피로함에 파르르 떨리는 한숨을 몰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분명 짧아져 있던 머리카락이 길게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 보여 왔다. 어? 커다란 물음표가 쿵! 떨어져 내려온 충격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겨우 제 몸을 가누며 그것을 한참 보다가, 서서히 숨을 들이 삼키면서 눈을 부릅떴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통렬히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아아, 꿈이었던 것이다. 꿈이…….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점점 몸을 웅크렸다. 아닐 것이라고 믿었는데 망상이었던 것뿐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실컷 기만당하고 농락당한 꼴이라 울컥해버렸다. 그 울컥함이, 밑바닥의 저 아래까지 겨우 누르고 짓밟아놨던 서러움과 서글픔을 모조리 함께 끌고 올라와버려서 왈칵 눈물을 쏟아버렸다. 아아, 안 돼. 안 돼…. 소리 없는 울음을 내지르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보는 것도 아닌데 쥐어뜯듯 얼굴을 움켜쥐고 감싸며 움츠러들었다.
안 된다. 약해져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제 친구들이 죽는다고 했다. 그들이 모두를 죽여 버린다고 했다. 탑을 끝까지 올라가, 살아있는 신이 되어 탑의 왕을 죽여야만 제 친구들이 무사할 것이라고, 그 남자가 그리 말했었다. ‘그 날’ 이후로 뼈에 사무치도록 반복하고 되뇌면서 스스로를 다잡아왔다. 저로 인해 제 친구들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 왔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견딜 수가 없을 테니까. 그랬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서럽게 울었다.
차라리 이런 거, 꾸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았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혼자서만 감당하면 되는 일이었다. 힘겹더라도 억지로 견디고 버티면서 지금껏 해왔던 대로 그네들이 바라는 것처럼 계속해 탑을 올라가면 되는 거였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행복하고 비참한 꿈을 꿔버리고 마는 걸까. 한번 터져버린 감정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리움에, 외로움에, 쓸쓸함에, 서글픔과 서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 봐도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고독에 사무친 눈물이 손바닥 안쪽에 가득 흘러넘쳤다. 상처가 터지고 벌겋게 드러나 벌름거리는 환부가 지독하게 아파왔다. 한참을 오열하고, 또 다시 한참의 시간을 보낸 뒤 얼굴에서 손을 땠을 땐, 울며 잠에서 깨어난 뒤였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끊임없이 훈련을 반복했고, 자신을 향해 슬레이어가 되라고 부추기며, 탑의 왕을 죽이라고 수백 수천 번에 걸쳐 강요하고, 자신들의 숙원을 이루라며 소원을 비는 광신도들의 추앙을 받으며 탑을 올랐다. 탑을 올라가면서 이와 같거나 비슷한 꿈들을 몇 번에 걸쳐 꿈 꿨고, 잠에서 깨어나 말라버린 슬픔을 쏟으며 울고, 무어 하나 변하지 않는 현실에 포기하고 체념하길 반복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달콤한 소망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옆으로 이어진 테라스로 걸음을 옮겨 찬바람을 쐬고,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깊이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엔도르시 씨의 ‘안 나오면 죽는다.’라는 살벌하기까지 한 메시지를 포켓으로 받을 때에도,
“꿈, 아니라고. 돌아온 거 맞아.”
여전히 잘 잔다 했는데 갑자기 쿵쿵 거리는 소란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방 밖으로 그대로 뛰쳐나가려는 쿤을 불러 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는 사람이 더 놀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뻣뻣하게 이쪽을 향해 돌아서는 그의 얼굴을 봤을 때, 저도 모르고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다 깨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런 쿤의 모습은 이제껏 본적이 없었다. 쿤 씨는 언제나 늘 단정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밤?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불러오는 목소리에 대답을 하자, 얼마 걸리지 않아 맥 빠진 웃음을 터트리는 쿤이었다. 갑자기 왜 웃는 걸까, 궁금해 하다가도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그를 보니 현실감이 확 와 닿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돌아왔나 보다 라며 재잘거리는데 쿤 씨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꿈이 아니라고. 그 말에 그만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만 밤이었다. 여태껏 꿨던 꿈속에서 만났던 쿤 씨는 단 한 번도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준적이 없었는걸….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만 있는데, 지척까지 다가와서는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고 툴툴거리는 쿤의 목소리에 퍼뜩 표정을 수습하다가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맥없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죄송하다고 그에게 사과를 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변명하듯이 에둘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테라스로 나오는 쿤의 뒤를 따라 난간 앞에 서서, 홀로 깨어나 있을 때의 시시하지만 무척 신기했던 기분들을 그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 떠들지 않으면 꿈에서 깨듯 휙 사라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별거 아닌 말에도 늘 그렇듯 쿤은 성실히 대답해줬고, 또 다시 꿈이 아니라면서, 다시 쾅쾅 못 박아오는 말이라 있는 힘껏 웃을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쿤 씨가 한 말이니까, 조금은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쿤의 말을 곱씹으며 꼭꼭 삼켜보는데 ‘그러고 보니’하고 운을 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지만 이어지는 소리가 없음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서 가만히 기다리자 멋쩍게 웃더니 두 팔을 벌려오는 그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양 팔을 활짝 펼치는 행동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이리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언젠가의 꿈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기시감을 느끼다가도, 저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는 놀라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오라고 부르는 거라 하더라도, 넙죽 가기엔 쑥스러운지라 쭈뼛거리게 된다. 손가락 끝으로 뺨을 살살 긁고 눈꺼풀을 깜빡깜빡 거리면서 시선 둘 곳을 찾아 헤맸다. 으음, 하고 낮게 앓는 소리가 목구멍을 간질거린다.
꿈이 아니라면 부디 이루어지기를.
반복되는 꿈속에서 그를 마주하는 그 때마다 소원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씩 붙잡고 잡히기도 하면서, 쿤에게만은 그것을 허락받지 못하는 것처럼 손을 뻗을 때마다 그가 제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꿈에 시달리기도 벌써 7년째라, 아무리 믿으려 해도 조심성 많은 고양이처럼 까다롭게 굴게 돼버린다. 지금만 하더라도, 어쩌면…. 걱정을 집어먹는데, 저를 봐오는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복잡하던 사고가 우뚝 멈춰 섰다.
실로 보기 힘든 표정을 지을 정도로 이 상황을 어색해 하고 있는 것이 역력한데도, 새파란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쿤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쩐지 바보 같이 느껴졌다. 눈치를 살피고 머뭇거리면 더 쑥스럽고 행동하기 어려워질 뿐이다. 어색하고 낯간지러워서 그렇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인 거다. 실은, 바라마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꿈이든 현실이든 지금 제 앞에 있는 이가 쿤이라는 건 변함없다. 새파랗게 반짝거리면서 저를 똑바로 바라봐오는 청금석의 눈동자를 홀린 것처럼 바라보다가, 흘러나오려는 웃음소리를 참으면서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 둘, ―채 세 발자국도 되지 않는 그 정도의 거리였다. 마찬가지로 양 팔을 벌리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쿵쿵 뛰었다. 그 쿵쾅거림이 너무 심해서,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괴로울 지경이었다. 고작 껴안으려고 하는 것뿐인데 숨이 멎어버릴 것 같다니. 우스운데도 사실이라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언제나, 언제나, 제 앞에서 사라지는 당신의 잔상을 쫓으면서 야속함에 어찌나 울었는지 모른다. 몇 년 만에 당신의 얼굴을 보게 됐는데도 등을 돌려야만 했던 그날, 그 폭발 속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서 어찌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살아있을 거라 믿으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 비집고 나오는 공포에 온 사고가 짓눌리곤 했다.
이번엔 제대로 당신에게 닿아볼 수 있기를. 제발 사라지지 말아줘요.
가지 말아줘요.
무섭고, 두려웠다. 또다시 쿤 씨가 휙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했다. 결국 몸이 겹쳐지기 바로 직전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 몸을 끌어안고 그 품에 안겨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예상을 머리 한구석에서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
쿵-하는 작은 흔들림이 느껴졌다. 몸을 죄어오는 팔의 힘에 감고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사라져버린다면 그 조각이라도 붙잡겠단 의지로 힘껏 끌어안은 두 팔 안으로 단단한 몸이 가득 들어차있다. 겹쳐진 품안에서, 따뜻한 온기가 동그란 형태를 띠며 차오른다. 서로의 무게가 기대짐에 휘청거리기도 잠시, 어렵지 않게 중심을 잡아 멈춰서면서 그 품에 꼭 안겨들었다. 호흡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쿤을 끌어안고 있었다. 저보단 조금 더 높은 어깨에 코를 묻고 있다가, 아파올 만큼 꽉 죄어오는 힘에 윽! 짓눌린 신음과 함께 기침을 터트렸다. 아차, 하듯 으스러트릴 것 같은 힘으로 끌어안아오던 팔의 죄임이 알맞게 풀려나갔지만, 쿤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제 팔 안에 있다.
거짓말 같고 믿겨지지가 않아서. 조금 전 숨이 막혔던 것에 사위를 하듯이 쿤의 등을 쿵쿵 두드리다가, 그가 했던 것만큼 꽉 끌어안아봤다. 단단하게 안겨져 오는 몸은 따뜻했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하듯 부볐다. 처음엔 옷자락에 늘러 붙어 있던 바람 냄새이다가도, 이내 부드러운 내음이 맡아졌다. 기분 좋고 다정한 냄새다. 느릿하게 숨을 몰아쉬자 쿤 역시 깊숙이 얼굴을 묻으면서 단단히 품에 당겨 안아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광을 부리듯 안겨 있는데, 등을 가볍게 두드려오는 손길에 숨을 흡, 들이쉬었다. 토닥, 토닥, 토닥. 일정한 속도로 등을 두드리던 것은 움직임을 바꾸더니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다정한 손길이라서, 눈물이 왈칵 터질 것만 같아 입술을 악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늘 사라져버렸으면서. 아무리 애원하고 붙잡으려고 손을 뻗고, 가지 말라고 소리를 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는데 그가 사라지지 않는다. 쿤 씨가, 정말로 있었다. 그가….
“어서 와, 밤.”
맞닿은 몸을 통해 울림은 이토록 상냥해서, 겨우겨우 참아 삼키며 감정을 진정시킨다고 했는데 기어코 눈물을 쏟아버리고야 말았다. 아, 아, 아, 아……. 말로는 어찌 설명할 수도 없는 감정들에 목이 메어왔다. 일그러지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탄성과 울음이 목울대를 울리면서 겨우겨우 쏟아져 나왔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제 가슴을 벅차게 울려오는지, 과연 당신은 알고 있을까.
두근거리며 울려오는 고동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이제야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단 사실에 속절없이 기뻐하고 안도하면서, 이 온기를 조금 더 느끼고 싶어 매달리듯 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쿤 + 밤] 가장 소중한….
W. 노량
For. GGAM
탕수육 팀에게 ‘쿤의 방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노크를 해야 한다.’가 완전히 못 박혀 버린 건 쿤이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토록 급한 일이었는가. 지금 와서 되짚어보자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일이었다. 허나 당시엔 너무도 다급했던 자왕난은 앞뒤 재볼 것도 없이 쿤을 부르짖으며 그의 방문을 벌컥 열고 쳐들어갔었다. 그리고 등대로 다가오는 시험과 관련된 정보와, 그 외의 자료들을 온갖 수법과 루트로 긁어모아 정리하고, 팀원들에게 알맞은 훈련의 내용과 스케줄관리 등의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쿤의 시선이 제 방에 무단 침입한 이를 향해 매섭게 꽂히는 건 동시에 일어났다고 왕난은 회상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오금이 저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허락도 없이 방에 막 들어왔다고 저러는 건가. 설마 벼락같은 노성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란 걱정은 잔뜩 끌어안고 새가슴을 졸이는데, 온갖 상상이 몰아치는 머릿속과는 달리 현실은 차분하기만 했다. “넌 노크도 모르냐.”라는 예의를 따지는, 신경질이 뒤섞이긴 했지만 꽤 담담한 핀잔이 돌아왔다. 주위에 깔린 분위기와는 너무 딴판이라 얼빠지는 소리를 내며 의아해하는데, “뭘 그리 얼빠진 얼굴이야? 무슨 용건인데.” 라며 칼같이 본론을 물어오는 쿤이었다.
화난 줄 알았는데, 아닌…가? 기분 탓인 건가?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처럼 긴장하며 한참 눈을 굴렸을까. 용건을 묻는 말 외엔 더 이상 가타부타 따지지 않는 쿤을 보며 기분 탓이었나 보다! 하며 왕난은 멋대로 안도했고, 그 대가로 왕난은 그날 하루 종일 불쾌로 가득한 쿤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는 영광을 누리고야 말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하더라도 이 즈음 되면 누구든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가시방석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냉랭하고 고요했기에 숨 막히도록 무서운 분위기에 짓눌리며, 터져버린 볼보다도 더 쓸모없게 쭈그러든 왕난을 목격하게 된 탕수육 팀원들은 그 이후로 누구도 쿤의 허락 없이 방문을 열어 재끼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기로 결심하게 됐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라는 것은 생기기 마련이다.
*
방문이 느릿한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라크의 입버릇이고 신수생명체들 중 거북이라 하는 것들이 걸어가는 움직임보다도 느리고 또 느렸다. 신중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침을 삼키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워질 정도였다. 가느다란 숨소리도 허락지 않는 정적 속에서, 움직이다 멈추기를 몇 번씩 반복하며 열리던 방문이 일정 틈을 만들어내기까진 얼마나 걸렸을까. 신중한 작업 끝에 만들어낸 틈 사이로 빼꼼 안을 들여다본 스물다섯 번 째 밤은 실로 놀랍다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동그랗게 떠진 눈만으로도 나 엄청 놀랍소, 라는 걸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기어코 허, 하는 감탄까지 내뱉었다.
“……진짜 잔다.”
“…그러게 말했잖아.”
내 말이 그리 안 믿기더냐. 신뢰도가 이것밖에 안된다니! 아우성치듯 옆에 서서 마찬가지로 방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던 왕난이 항의해왔다. 잔뜩 소리를 죽인 채 속닥거리는 꼴이라서 우습게 들린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 있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왕난의 핀잔에 밤은 굽히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말이죠, 하고 숨소리가 섞인 말로 반박을 하다가 입을 다물곤 서둘러 방 안을 살펴봤다. 이 소리에 깰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잘못해 목소리를 높였다가, 저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쿤을 깨우거나 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이대로 방문 앞에 붙어서 월월왈왈 떠들었다간 그대로 쿤을 깨워버릴 것 같은 불길함이 등 뒤에서 엄습해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뒤척거림이나 깨어난 기색 없이 고요히 잠든 모습 그대로라서, 밤은 다행이란 말을 꼴깍 삼키며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쨌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자리를 옮기자면서 조심스럽게 살짝 방문을 완전히 닫은 밤은 왕난의 등을 떠밀면서 거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깥으로 나간건지 거실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앞선 외출에서 너무 과하게 놀았던 탓인지, 저녁 식사 전에 잠시 쪽잠을 청하는 미생이와 아이에게 아낌없이 무릎을 내어주며, 잘 자라는 듯 어깨를 토닥이는 아크랩터가 있었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친딸이 있는 건지, 진정 제 딸을 보듬는 것 같은 애틋함마저 절절하게 묻어나는지라 우와…나지막한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아버님 정말 자애로우시다.”
“시끄러워.”
놀리는 탄성에 아크랩터는 단 한마디로 깔끔하게 일축시켜버렸다. 그 사이에서 밤은 하하, 웃으며 탁자 아래 공간에 놓인 바구니에서 얇은 담요를 꺼내와 미생에게 덮어줬다. 몸을 덮어오는 얇은 무게 때문인지 잠깐 뒤척거리지만 깨진 않는다. 친언니처럼 따르던 고생과 떨어져서인지, 프린스나 이화가 아니면 아크랩터와 곧잘 붙어 있는 미생이다. 처음엔 그를 꽤 무서워했던 것에 비하자면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이화는 가문의 사람과 만나기로 해, 아침 일찍부터 외출한 상황이었다.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은 걸 봐선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지는 모양이라면서, 왕난은 목덜미 뒤의 뿔을 꾹꾹 잡았다.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온다 했던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 밤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눈부시도록 붉었던 하늘은 금방 어둡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곧 까맣게 물들여지기도 잠시 금방 하얀 볼 라이트 빛에 은은하게 비춰질 바깥을 떠올리는데, 애 깨겠다며 목소리를 낮추라며 아크랩터의 핀잔이 왕난에게 날아들었다. 어차피 이제 곧 일어나야 할 텐데, 그래도 목소리를 낮추며 따지는 소리를 뒤로 하며 조금 전 자신들이 있었던 쿤의 방문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쿤 씨가 이 시간에 잠든 건 또 처음보네요.”
“응? 뭐야, 그 말. 저 녀석도 사람이니 낮잠 정도는 잘 수 있는 거잖아, 밤.”
이 시간 즈음 되면 낮잠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왕난의 말에 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하다고 수긍은 했지만 그래도 별 일이라고 생각했다. 늘 제시간에 맞춰서 자는 사람이다 보니 더 의외라고 느끼게 되는 걸까. 혹여 어디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금방 아서라 했다.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그 ‘10가문’의 직계 핏줄인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기준의 범위에서 이미 까마득하게 벗어나있는 그네들의 신체능력을 떠올려보자면 설마, 하고 너털웃음을 흘리게 된다. 물론 그 설마가 뒤통수를 때려올 때도 간혹 있는 법이다. 지금이 그 경우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만…. 현재 층의 시험이 이제 멀지 않은 탓일까.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이긴 했지만 어딘가 무리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지만, 하고 중얼거림을 혓바닥 위에서 도르륵 굴렸다.
그래도 란 씨처럼 쉽게 방전되는 사람은 아닐 텐데, 라며 쿤을 향한 걱정을 담뿍 담으면서도, 스페어 팀에 있는 쿤 란까지 한 번에 까버리는 밤의 말에 왕난은 허허, 헛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쥬 비올레 그레이스’가 아닌 본래 ‘스물다섯 번 째 밤’으로 돌아온 밤은 이전에 비해 굉장히 밝아져 있었다. 말도 많아지고 감정 표현도 풍부해진데다가, 이전에 비하면 사교성이 늘었다고 해야 하나. 좋은 현상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미묘하게도 말의 수위가 이전보다 높아진 것 같았다.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위트라서, 퍼그가 애를 버려놨다던 쿤의 한숨 내쉬듯 말하던 한탄이 떠올랐다.
“모처럼 조용해져서겠지. 쿤 하나만 빼고 다 나갔잖아?”
“아, 그거 신빙성 있다.”
이 시간에 숙소가 조용했던 날이 또 있었던가? 곰곰이 되짚어봤지만, 시험을 통과하러 갔을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왕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용해서라, 그 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다행일 텐데요, 라는 밤의 중얼거림에 분명 그럴 거라며 왕난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발단은 점심식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아직 배가 꺼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저녁은 뭘 먹나.”라는 왕난의 고민이 거실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뭘 먹지, 뭘 먹을까. 식사 당번이라면 으레 가질만한 고민거리였지만 반복되는 소리를 듣다보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미간에 주름을 두 개는 족히 접고서 미생과 다음에 할 게임을 고르던 프린스가 기어코 “마침 주말이니까 바비큐나 해먹자.”라고 의견을 던지는 것으로 왕난의 고민을 틀어막았다. 마음 같아서야 좀 생각 좀 해두라고 쪼아대며 알아서 하라 방관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이화의 불을 보듯 뻔한 일인지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20층 시험의 인연을 계기로 함께 팀을 이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몇 번은 뜻대로 하라 놔뒀다가 둘도 없는 소중한 인생의 경험치를 쌓게 된 그들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럼 탕수육!”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바에야, 귀찮음을 무릎 쓰고서라도 아무 메뉴나 던져줘서 그 쪽으로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 그날 식탁과 자신들의 위장의 안녕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 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지만, 무색하게도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오랜만에 탕수육이나 시켜 먹을까? 하며 슬그머니 제 의사를 꺼내드는 왕난이었다.
무슨 탕수육을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들러붙기라도 한 걸까. 무언가가 그의 어깨 너머에서 보이는 건 착각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하며 저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랜만 좋아하네. 콧방귀가 절로 나오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먹었던 게 지난주였다. 고작 며칠 지났다고 오랜만이란 말인가. 그리 외치고 싶어 하는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주위에 깔렸다. 달력을 코앞에 들이대고 날짜를 짚어줘야 알거냐는 기세가 팽배했지만, 왕난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여전히 해맑게 웃는 얼굴로 “어때?”하고 되물을 뿐이었다. 기막힌 꼴에 저마다 말문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데, 라크만이 유일하게 “지독한 카레 거북이 같으니….”중얼거리며 미간의 골을 깊게 팼다.
자왕난의 탕수육 사랑이 지극함을 기존 팀원들은 20층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고, 납득 또한 가능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 만큼, 각자의 식성이라든가 호불호라든가 있기 마련인데 그걸 모조리 씹어 먹어버리는 태도엔 문제가 있다. 다른 건 어떠냐고 의사표현을 하면 고민을 해본다는 건 그나마 예의가 있는 걸까. 그래봤자 탕수육을 먹겠다고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는 왕난을 이긴 팀원은 아직까진 없었다. 그거 또 먹는다고 죽기라도 하느냐 하는 마음에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한 경우도 몇 번 있기도 했다.
하물며 ‘쥬 비올레 그레이스’라는 슬레이어 후보시절의 밤이 거부의사를 드러내도, 오늘 저녁당번의 고유권한이라는 똥배짱을 부리면서 기어코 주문에 성공하기까지 했더랬다. 차라리 자기가 당번일 때만 그래주면 또 몰라.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시험에서 통과한 뒤 저녁 회식자리에서는 필수고, 다른 사람이 맡아도 자신이 먹고 싶을 땐 하루 종일 당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틈 날 때마다 탕수육 노래를 불러 괴롭히는 건 선택에 옵션이었다.
이제 탕수육의 ‘ㅌ’자만 들어도 입안에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착각마저 드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이즈음 됐으면 물리기라도 할 텐데 놀라울 만큼 왕난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가 저놈의 위장은 어찌 되먹은 건지. 누가 저 폭군을 막으리오. 이화라도 있었다면 “당신, 또 그 소리인건가요!!” 하고 버럭 지르기라도 했을 텐데,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외출한 상황이다. 꿈도 희망도 없지. 아를렌의 손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그들과 떨어지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밤에게 있어 그건 일상적인 풍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으려니, 반쯤 체념하기도 했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순 없지 않느냐 하는 마음에 입을 열려던 차였다.
「예전에 말했을 텐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싫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누구하나 입 벙긋 하지 않던 그 상황을 깨트린 건 쿤의 한마디였다. 식후로 준비된 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벌써 두 잔째를 비우면서 등대를 들여다보고 있던 쿤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뭔 말을 하려고? 아예 짐작가지도 않는 건 아니었던지라 또 다른 긴장감이 깔렸지만, 마치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시선을 휘어잡는 명배우처럼 쿤은 눈 하나 깜짝치 않고 잔만 비웠다.
누군가에게서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들었는지 어울리지 않게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반쯤 비워진 컵을 가볍게 탁, 내려놓은 쿤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양 좋은 입술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려내더니 미소라고 부를 만한 것이 그 위에 덧그려졌다. 지체 높은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우아함이라 보고 있는 누구든 감탄할 법 했지만, 쿤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한 번 씩 일이 터졌던지라 팀원들은 넘어가지도 않는 마른침만 애써 꼴깍꼴깍 삼켜댔다. 이번엔 또 무슨 폭풍이 몰아치려고 이러나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그들이 그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쿤은 현재 발달중인 폭풍의 눈을 응시했다.
「한 달도 안돼서 탕수육 타령을 하면 어쩐다고 했더라, 자왕난.」
밤이 없는 동안 일어났던, ‘지난 일’에 관하여 묻는 쿤의 말에 팀원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돌렸고, 자왕난은 즉각 꼬리를 내렸다.
「장 봐오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해줘서 고마워, 리더.」
시원시원하다 못해 허무할 만큼 간단하게 마무리가 지어졌지만, 누군가의 분위기가 초토화 된지는 오래였다. 꼭 이럴 때만 리더로 추켜세워 주는 거냐는 불만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이 의미를 몰라 의아해하는 건 밤과 라크가 전부였다. 대체 무슨 일이 길래? 물음표를 얼굴 옆으로 동동 띄우면서 궁금해 하는 밤에게, 이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처럼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별거 아니야, 밤.”하고 대답하는 쿤이었다. 그런 둘을 보면서, 밤이 없는 동안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 쿤이 팀에 합류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중화반점의 주문 횟수가 기어코 두 자릿수를 넘어가던 날 저녁, 자왕난의 입에 탕수육과 소스가 따로따로 처박히듯 쏟아 부어졌던 떠올리면서, 아예 시선을 어느 한곳에 고정시켜버리고자 애를 썼다.
집 밥이나 처먹어. 웃음기 섞인 상냥한 환청이 쿤의 목소리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이라며 애써 부정하면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아크랩터가 이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자, 결정 됐으면 장이나 보러 나가자. 아까 점심 준비하면서 냉장고가 비었다 하지 않았느냐, 이참에 필요한 것들도 사러 다 나가자, 물론 돈은 쿤 포켓으로 긁을 거니까 너무 걱정 말자고. 아직 할 일이 남았는지 너희들끼리 다녀오라고 하면서도 포켓 좀 작작 긁으라는 잔소리를 하는 쿤을 뒤로 하고 모두를 끌고 외출을 나섰다.
굳이 우르르 나갈 필요는 없었겠지만, 몇 명이서만 단출하게 나가기보단 다 같이 나가는 편이 떠들 것도 많아지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에는 효과적일 게 분명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숙소에만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고. 특히 축 쳐진 왕난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는 적격이다. 발단이며 계기가 어쨌든 의도했던 대로 저녁이 다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왕난의 기분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고, 그간 피곤했던 일들을 떨쳐낸 덕분인지 팀원들의 분위기도 살아났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점심이 지난 상황에서 무작정 나간지라 근처 시내를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지만, 길거리에서 즉석으로 열린 이벤트 덕을 많이 보게 됐다.
가시지 않은 흥분과 들뜸에 와글와글 떠들면서 다시 돌아온 숙소는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물론 혼자서 집을 지키는데 시끄러울 필요가 있겠냐 싶지만, 외출했던 이들이 돌아왔는데도 쿤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처음엔 자기일 보는데 바빠서 나와 보지도 않는 건가 했다. 어련히 하겠거니, 괜히 또 하는 일을 방해했다간 이번에야말로 사단 날지도 모른다면서 왕난이 떠는 요란에 의해 누구도 쿤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본래 목적은 장을 봐오는 거였기에, 사온 물품들을 정리해 냉장고를 채우고 이제 본격적으로 바비큐를 해먹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도 여전히 쿤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던 것이 기어코 의문의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밤이 외출하고 돌아올 때는 꼭 나왔던 쿤이 아니던가. 혹시 외출을 했나? 그럴 거면 포켓으로 일찍이 연락을 했거나, 시선 닿는 곳에 쪽지 한 장이라도 남겼을 텐데, 암만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배고파, 얼른 고기 구워 먹자! 시끌벅적한 소란과 함께 사온 재료들을 가지고 바깥으로 들고 나가는 와중에도, 쿤은? 하고 찾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결국 왕난은 어쩔 수 없이 쿤의 방문 앞에 섰다. 앞선 전적이 있는지라 방문을 똑똑 두드리면서 그를 불러봤지만 암만 기다려도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암만 조용하다 하더라도 메아리 한번 돌아올 따름인데 그마저 없으니 답답해졌다. 이 방에 출입하는 이들 중 언제나 그린라이트인 밤이나 라크를 불러다가 들여다보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둘 다 밖에 나가있는 건지 보이지도 않는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마른 침을 애써 삼키면서 왕난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난 분명 노크했어. 노크했다고. 두 번이나 했어! 그런데도 씹은 건 쿤 너라고! 문을 열었다 날아들 시선에 대비해 외칠 말을 수십 번이고 되뇌면서도,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불안함으로 모든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책상 앞도 아닌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쿤을 발견하곤 휘둥그레 눈을 뜨고 말았다.
멍하니 있다가, 오래 가지 않아 조금 전 까지 하던 짓이 뻘짓이었단 걸 깨닫고 왕난은 분개했다. 이 자식, 여태껏 말이 없던 이유가 퍼 자고 있어서였냐!! 버럭 소리 치고 싶었으나, 그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쿤 씨는요? 안에 안계세요?”라고 물으며 다가온 밤의 목소리에 흐어억! 소리 없는 비명을 속으로 내지르면서 기겁해버렸다. 이렇게까지 재빠른 적이 있었나 하는 속도로 왕난은 순식간에 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갑작스럽게 입이 틀어 막혀지자 반사적으로 으읍?!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연신 쉬! 쉬!! 하는 바람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벌이는 왕난의 꼴에 밤은 놀란 눈을 깜빡거리면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황당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조금 전까지 쿤의 방문 앞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긴장이 풀렸단 소리 아냐, 그거?”
“꼭 무슨 잘 벼른 칼 같았지.”
차라리 웃기라도 하면 몰라,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면서 악마새끼보다 더 지독하게 굴던 쿤의 행보를 떠올리면서 왕난은 몸서리를 쳤다. 훈련 직후의 피로함이 밀려드는 착각이 든다. 말마따나 잘 벼른 칼이었다. 잘못 말하면 그대로 푹 찔려버릴 것만 같았다. 좌우간에, 집이 조용해졌단 이유로 저 쿤이 잠에 들다니. 생각해보니 참 별난 일이구나. 밤이 이렇게까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하면서도 한편으론 당연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왕난과 아크랩터는 실없이 떠들었다. E급 공방전의 우승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온갖 변수와 사건사고와 행운과 노력 끝에 이뤄진 결과긴 했지만 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 공방전에 참여하기 위해서, 밤과 호량 없이, 자신들끼리 시험을 통과하게 만들기 위해 부득부득 악을 쓰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땐 더하다고 느꼈던 훈련의 일과가 떠오른다.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면서도 일일이 따져보자니 그간 쿤이 참으로 고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수 없고 너무 혼자 잘난 녀석이라서 느끼지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비슷한 생각을 했나본지 시선을 교환하던 둘은 쿤의 방 쪽을 바라보면서 이제 저녁인데,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밤을 보며 웃어버렸다. 하여간에 이놈이고 저놈이고.
공방전 이후 월하익송의 관리 하에 있는 리조트로 모조리 오게 된 관련 인물들은 꽤나 많은 숫자였다. 또 그네들 사이에서도 알고 지내왔고 얼굴을 보는 것이 오랜만인 덕에,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웃고 떠드는 그 자리는 그야말로 시장바닥보다도 더 한 떠들썩함으로 가득했다. 팀의 우승이 놀랍다는 사실 자체는 둘째치더라도, 죽은 줄 알았다는 친구들을 만났다는 벅참이 두 사람과 관련된 이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들인 쿤과 밤, 거기에 라크까지 포함한 셋은 리조트의 방 어딘가에 처박혀서 나란히 골아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소개받은 이들 중, 쿤과 밤의 친구라는 이수와, 쿤의 기존 팀이었다는 노빅과 단은 술친구로 썩 괜찮은 상대들이었다.
새벽까지 떠들고 마시는 첫날을 보내고, 왕난까지 기운을 차려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녁에도 어김없이 술자리가 이어졌다. 첫날에 비하자면 다소 차분해진 분위기였지만 술이 들어가다 보니 다시금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만취하지 않는 정도까지만, 하고 마시기 시작했어도 웃고 그간의 일들을 떠들다보니 그런 게 무어 필요하고 중요하나 싶어졌다. 술기운에, 즐거움에, 전날과 비슷한 양상을 띠며 웃고 떠들던 와중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아마 시작은 아를렌의 손에서 일어난 일로 난 정말 저 녀석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는 한탄어린 이수의 말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수들에게서 따로 갈라져 나와 새로운 팀을 꾸려 탑을 올라가고, 그 팀이 퍼그에 의해 와해 된 이후 탕수육 팀과 합류해 공방전에 참가했을 때에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쿤의 목적은 맹목적일 만큼 단 하나였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위하여. 그 친구가 스물다섯 번 째 밤을 말한다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당시엔 죽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 이미 죽어버린 이를 위하여 7년이란 그 긴 시간동안 목을 메어왔단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터무니없는 막연함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이냐고 믿기지 않아 하면서도, 사실이 그러했던지라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라며 반쯤 취한 술기운으로 중얼거리던 단의 말에, 그 자리에 둘러앉아있던 이들은 저마다 복잡하고 기묘한 감상을 떠안았다.
재수는 없어도 머리 좋고 능력도 빼어난 데다가, 그런 만큼 복잡하게 꼬인 녀석이란 것을 짧은 기간 동안 어렴풋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알게 되니 정말로 굉장한 녀석이라고 깨닫게 됐다. 도대체 무엇이 쿤을 그렇게까지 옭아맨 것일까. 스물다섯 번 째 밤이라는 그 존재 자체 때문일까?
그러다보니 밤도 마찬가지라는 걸 뒤늦게 알아채게 됐다. 퍼그에 의해 떨어져버린 이전에 비해 지금의 밤은 훨씬 밝아진 분위기로 아낌없이 웃고 있었다. 비올레 시절의 밤을 접하고 알고 있던 기존 탕수육 팀원들은 그런 밤의 변화에 조금 어색하고,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밤이 탑을 오르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그의 슬레이어 후보가 되어 광신도들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모두의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 되고, 멸시에 찬 시선과 말을 듣고 때론 이유 없는 공격과 대우를 당하면서도 밤이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친구들의 안전. 그것만을 위했고 그것만을 바라보면서 밤은 탑을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쿤과 라크, 이수와 다른 친구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고독도 슬픔도 견뎌내겠다는 그 마음이, 쿤의 밤을 향한 맹목과 다른 듯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친구끼리는 닮는 게 아니냐면서 창이 낄낄 웃던 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이런 걸로 우열을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왕난은 아마도- 하는 생각을 남몰래 삼켰다. 밤이 비올레로서 퍼그에 있을 때 얼마나 괴로운 일들을 당했는지 왕난으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괴로웠으리라. 하지만 오직 그들만의 관계를 두고 생각해보자면 아마 그러하지 않을까 하며 척도를 감히 재어보았다.
아마도, 이젠 만날 수 없는 이가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공명심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지막조차 지키지 못하고 떠나 보내버린 소중한 이를 위하여 그를 계속해 그리고 위한다는 건, 제대로 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괴로운 일일 테니까…. 언제나, 언제나 씩씩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라 왕난은 후, 한숨을 가볍게 몰아 내쉬었다. 생각이 깊어져서 그런 거라고 변명하면서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열심히 올라가고 있으니까.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구나. 흘러간 시간이 참으로 빠른 것 같았다. 괜히 입 안이 써져서 조용히 자조하는데 저녁 당번인 녀석이 왜 아직도 안 나오고 뭐하냐는 프린스의 버럭 거리는 외침이 쩌렁쩌렁 들려옴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번뜩 정신을 차리며 잠깐 그대로 있다가 이름 석 자를 빽! 불러오는 소리에 왕난은 머리를 뒤집듯 벅벅 긁었다. 그 자식, 무슨 기차화통이라도 삶아먹었나. 쪼끄만 주제에 뭐 저렇게 목소리가 크냐. 인상을 박박 썼지만 말대로 진즉 나가서 준비했어야 했던 지라, “나간다, 나가!!” 하고 맞받아치고는 밤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두드렸다.
“밤, 너 정말로 좋은 친구 둔거 같아.”
“…왕난 씨?”
“뭐, 그런고로! 쿤 녀석 깨우는 건 네가 해. 우리가 들어가면 화낸다고.”
“쿤 씨 가요? 에이, 설마….”
“진짜라니까. 너 아까부터 사람 말 못 믿던데 말이지. 노크도 없이 쳐들어가도 무사한 건 이제껏 너랑 라크 둘 뿐이야.”
물론 라크에게도 한소리가 날아들긴 했다. 한소리‘만’ 말이다. 그마저도 없이 묵인되고 오히려 반김까지 받는 건, 밤이 유일무이했다. 차별이 심한 게 아니냐며 따져봤자 쿤이라면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해버릴 게 분명했다. 그냥 포기하는 쪽이 속 편하고 입도 아프지 않지. 한편으론 당연하겠다고 수긍하게 되는 건, 라크와 밤이 쿤에게 있어 가장 특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을 오직 둘에게만 한 것이다. 저런 녀석에게 말이지.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은 무어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옛 성인들의 지혜에 감탄하는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밤의 표정에 잠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절대적인 예외의 행동들이 밤에겐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 테니. 그럴 리가요, 하면서 쿤의 철저한 내숭을 순진하리만큼 믿고 있는 어린양을 보자니 짧은 시간동안 쿤의 본성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왕난은 심란해졌다. 말해줘도 못 믿을 테고, 그렇다고 낱낱이 고해바쳤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쿤에게 훈련을 빙자해 무진장 굴림을 당할 미래의 제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지고 있었다.
…그냥 나중에, 스스로가 알아서 알아채질 바라는 것밖엔 방도가 없다. 알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지만 말이지. 철저한 계산 하에 이뤄지는 행동인건지, 그도 아니면 밤 앞에선 성질이 죽는 건지 모르겠지만, 밤과 함께 있는 쿤은 자신들과 지낼 땐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사람을 잘못 본줄 알고 눈까지 비볐었다. 하지만 잘못 본 것도, 헛것을 본 것도 아니라서 그저 허,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풀려나간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탕수육 팀원들은 부르르 떨었다.
어이고, 인간아. 그리도 밤이 좋더냐! 튀어나가려는 빈정거림을 어렵사리 참아 삼키고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지옥 입구에 내딛으려는 발을 겨우 빼내었다. 아니,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까지 감아버리는 게 상책이다. 아무렴.
프린스의 고함에 잠에서 깬 건지, 눈을 부비며 일어난 미생이 느릿느릿 소파를 내려오고 있었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길게 하품을 하면서도 걸어 나가는 미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아크랩터가 먼저 나가본다며 슬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면서 왕난 또한 “그럼 쿤 잘 깨워서 나와라.” 라고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하면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밤에게 쿤을 깨우라고 한 이유엔, 밤의 출입이 자유롭단 것도 있었지만 자다 깬 쿤의 성질에서 무사할 한명이란 것도 있었다.
자고로 바비큐는 야외에서 해먹어야지! 신이 난 외침이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듯이 꼬리를 남겼다. 밤만이 거실에 혼자 남아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자리를 보고 있다가, 슬슬 움직여 소파 위에 덩그러니 남은 담요를 정리했다. 도로 갖다 둘까 했는데 귀찮은 감이 있어 잘 개어 소파의 구석이 뒀다. 보드라운 재질의 감촉이 기분 좋아서 한참 손을 때지 못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닮은 왕난의 절규가 울렸다. 안 돼~ 망했어~ 숯에 불이 안 붙는다아아악!!!! 하는 고함이 쩌렁쩌렁 안에까지 뻗쳐 들어왔다. 불이 안 붙는다고? 그럴 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그 뒤를 따라서 다 준비했는데 뭐냐며, 돌멩이를 잘못 사온 게 아니냐는 목소리들이 따라붙었다.
주말마다 해먹는 바비큐는 이화의 불 조절이 조금은 조절이 가능해졌을 때 그것을 축하하고자 먹기로 했던 것이었다. 오늘은 늘 고기를 굽던 사람이 자리에 없는지라, 언제 오는 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오늘은 숯을 샀던 걸로 기억한다. 누가 숯을 사러갔었더라. 아마도 왕난 씨가 갔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는데 재차 소리가 울렸다. 돌멩이를 왜 사! 숯 사러 갔던 놈 누구냐! 카레거북이 네놈이냐!! 와아아--!! 외침과 절규가 뒤섞인 비명이 퍽 요란스러웠다. 그 소리에 끌리듯 내다본 창밖엔 아직까지도 붉은 빛이 남아있었지만, 어두워지기까지는 곧 머지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 구름 너머로 꼴깍 사라져버리고 남은 잔재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처음 그러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밤은 문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닫았다. 눈이 아프도록 붉고 눈부시던 볼 라이트의 빛이 은은한 흰 빛으로 바뀌기까지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지, 방엔 어두운 붉은빛에 젖어들어 있었다. 바깥에서 꽤 큰 소란이 있었는데도 방 안에까진 미치지 않았는지, 쿤은 여전히 놀랍도록 편안한 얼굴로 깊이 잠에 빠진 그대로였다. 아직도 주무시네, 숨소리 섞인 말을 중얼거리며 문을 완전히 닫은 뒤에도 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허리 뒤로 잡고 있는 손잡이를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깨우러 들어온 것이 목적이긴 했지만 착실하게 시행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자고 있는 그를 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좀 더 놔두고 싶기도 하면서, 이 상황을 아까워하다가 일순 깨달았다. 아, 그래. 아까운 거였다. 저도 모르는 세에 스스로는 그런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가 밤은 천천히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깐 휘청거렸지만 어렵지 않게 중심을 잡으면서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암만 조용하다 하더라도 한번 즈음은 뒤척거리기 마련인데 조금 전 왕난과 함께 들여다봤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설마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고양이처럼 잔뜩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침대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함께 꼬로록 잠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기분 좋게 자고 있는 쿤의 얼굴을 보다가, 버릇없이 그 위로 손을 뻗어 가볍게 흔들어봤다. 그 짧은 사이에 은은한 흰빛으로 바뀐 볼 라이트의 빛이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제 손 크기보다 조금 더 큰 그림자가 얼굴 위에 드리워져 어른거리지만 굳게도 닫힌 눈꺼풀은 조금도 깜짝하지 않는다. 시위하듯 바쁘게 손을 흔들어보다가 진짜 깊이 잠들어 있나보다, 결론을 내리고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어째 제가 하는 짓이 웃겨서 밤은 소리 없이 입술을 휘며 웃어버렸다. 어린애가 하는 짓도 아니고.
어쨌든 깨워야 할 텐데, 역시 깨우기가 아까운지라 계속 그렇게 서서 들여다보기도 한참이었다. 이대로 서 있기가 뭐해서 차라리 앉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의자를 꺼내 앉는 방법도 있었지만 괜히 큰 소리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가 그가 깬다면 낭패이지 않겠냐는 목적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침대 가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성인 남자의 무게만큼 매트리스가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워낙 조심스레 앉은 덕분인지 희미한 소음도 나지 않는다. 처음엔 엉덩이를 침대 가에 아슬아슬하게 붙이다가,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과감하게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한 쪽으로 기우뚱, 몸을 기울고 푹신한 침대를 손으로 딛으면서 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예쁜 얼굴이었다. 하얗고, 반듯하고.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있을 때의 그는 꽤 예리한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워낙 견실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보고 있자니 순한 듯, 어딘가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본인이 듣는다면 헛웃음을 터뜨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데, 그의 얼굴 위로 반쯤 드리워진 볼 라이트의 빛 때문일까. 어딘가 야윈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든 빈틈없고 철저한 사람이라 어련히 잘 하겠거니 싶지만, 그럴수록 스스로에겐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는 법이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한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되는 것이 일쑤다. 절대로 실패해선 안됐기에 페이스 조절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저만 하더라도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가는 일이 적진 않았다. …아무래도 식단에 조금 더 신경을 써봐야 할까. 그도 아니면 따로 뭔가를 더 챙긴다거나 하는 고민을 하는데, 불쑥 리조트에서 있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근 7년만의 재회였다. 그것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스물다섯 번 째 밤의 무사생환으로 이뤄진 재회였기에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슬퍼하고 우울해 했는지 아느냐를 시작해, 뭔 놈의 고집이 그리도 쇠고집이냐고 혼나기도 하고 리조트 측에서 준비해주는 음식을 먹고 떠들면서 정신없는 회포를 풀고 있었다. 어떻게 지냈냐는 둥의 안부를 물으면서, 한참 하츠와 그간의 이야기에 대해 떠들고 있었을까. 아무래도 전날의 전투에서 등대에 손상이 갔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손을 보고 와야겠다며 따로 외출했다가 들어오던 쿤을 발견한 이수가 밤의 어깨를 두드리며 뭐라 속삭거려왔다. 너무 작은 소리여서 하마터면 못들을 뻔 했지만 다행히 어느 말 하나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아무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보고 있자, 뭐 어쨌든 그런 거라면서 멋쩍게 웃다가도 근데 너는 뭐 하나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며 목을 꽉 죄이며 장난을 걸어오는 이수의 행동에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그대로 휘둘리고 말았다. 으와아, 하고 낮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이수의 장난을 기꺼이 받아내는데 “거기 아저씨, 지금 밤한테 뭐하는 짓이야?” 라는 쿤의 가시 돋친 한 마디가 꽂혀와 사방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토록 즐거웠던 소란을 즐기는 게 얼마만이였는지 모르겠다. 벌써 2주 전의 일이다.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웃음소리들이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게 언제였더라. 겨우 며칠 전이었는데 벌써 몇 주는 지난 기분이다. 듣자하니까 곧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시험을 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최근 들었던 친구들의 소식을 떠올리며 날짜를 짚어보다가도, 이내 다시 눈에 들어오는 쿤의 얼굴에 금방 생각을 접었다. …야위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다. 두 번씩이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잘못 본 것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밤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다 놓기를 반복했다. 이른 시간에 눈을 붙이고, 누가 들어와 이렇게 옆에 앉아있는데도 쿤은 여전히 깨어날 줄은 몰라 했다. 너무 고요해서 혹시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얕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움직임에 금방 안도했다. 이렇게 될 때까지, 무리를 할 필요는 이젠 없을 터인데…. 오직 저만이 앞으로의 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홀로 지고 있을 거라던 알량한 착각은 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걸까. 한심했다.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무리를 하는 쿤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속상해져서, 가슴 속이 따끔거리고 아파왔다.
「쿤 저 녀석, 정말 애 많이 썼으니까.」
소란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할 뻔 했던 이수의 말이 스쳐지나가듯 떠올렸다. 그 말을 몇 번이고 꼭꼭 되씹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그런 사람이란 것 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 라는 단순한 대답 한마디로 도저히 끝낼 수가 없어 말을 고르다가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무섭도록 머리가 좋고, 냉정하고, 철저한 그였다. 그리고 그만큼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2층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쿤 아게로 아그니스란 남자는 그러했다. 그 면만큼은 조금도 변함없어 보여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리도 안타까워서….
「치사하고 악랄하게 탑의 정상까지 모셔다 드리죠.」
무척 앳된 얼굴이었지만, 변함없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 미소는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즐거움이 넘치던 눈과 마주쳤을 때에도, 이렇게 입매를 휘며 웃었었다. 웃음은 전염된다지. 누군가가 했는지 모를 말을 떠올리면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폐부 깊숙한 곳까지 몰아넣었다. 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랬지만 부러 입을 다물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함께 탑을 올라가자 했던 그때의 그 약속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걸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미 답을 알고 있던 지라 묻진 않았지만, 때론 궁금해졌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좋았다. 약속은 이미 한번 깨졌었다. 스물다섯 번 째 밤이 죽었다고 알려졌던 그날에. 머리카락 끝을 꾹꾹 잡아당기며 스물스물 떠오르는 기억에 밤은 차분히 숨을 내쉬기를 반복했다. 공기 중에 오랫동안 노출된 안구의 습기가 말라 아파와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지라 오래 가지 못해 도로 눈을 뜨고 말았지만, 쿤은 여전히 자고 있다. 어린애들처럼 잘 잔다고 웃다가, 그럼? 하는 의문을 띄웠다. 약속이 깨져버렸다면 저희들에게 남은 건 뭘까. 이루지 못하고 부서진 약속의 잔영일까, 미련일까, 그도 아니면 다시 셋이서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일까.
쿤과 라크는 제 앞으로 떨어지며 나타나줬던 라헬이 아닌,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갔던 세상에서 만난 첫 친구들이었다. 두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이수 씨, 하츠 씨, 엔도르시 씨도…. 모두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저로 의해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키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듯 탑을 올라갔단 걸 제외하자면, 탑을 오르는 데에 어떤 목적의식도 가지지 못했었다. …애초부터 탑을 올랐던 계기는 저 위에 마련되어 있다는 그 모든 것들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였음을 곱씹으면서 밤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비올레로 살게 된 이후로는 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오직 그들의 안전만을 바랬다. 그렇게 지키고 싶어서, 목줄에 목이 졸려지더라도 버티고 견뎌 왔었다. 그러했는데, 한번은 그 바람마저도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일을 겪었다. 정말로 이 사람을 잃어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 순간의 절망감과 비참함이 다시금 떠올라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살아있을 거라고는 믿었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막이 터져나갈 것 같은 굉음과 무너지는 거대한 돌덩어리들, 붉고 하얗게 터져나가는 폭발 속 그 멀리에서 저를 향해 올려다보던 쿤이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지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행동의 결과가, 그의 죽음이라니. 온 방송에서 그가 죽었다고 떠들어대는 소리에서 귀를 막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제 믿음에 기대었다. 쿤 씨는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믿음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밤은 짧은 순간에 가장 유일했고, 최선이었던 방법을 선택했다. 그때 그를 향해 제 포켓을 던졌던 건 분명 틀리지 않았다고, 딛고 서 있는 발 밑바닥이 푹 꺼져버린 것처럼 휘청거리려는 스스로를 다잡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견뎠었다.
어느덧 무심코 쿤의 얼굴로 손을 뻗다가 제 행동을 깨닫고는 멈칫했다. 괜한 짓을 했다가 쿤이 깨버리면 어쩌나 걱정됐지만, 아직까지도 자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무책임한 결론을 도출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쥐지도 펴지도 못한 손을 움찔거리고 머뭇거리다, 손끝으로 쿤의 앞 머리카락을 살짝 옆으로 쓸어 넘겨봤다. 특유의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을 스쳐지나간다. 머리칼 아래에 있던 반듯한 이마가 손짓에 따라 드러나면서 훤한 얼굴이 보여 왔다. 절로 감탄이 나오도록 근사하고 예쁜 얼굴이 아닌가. 참 예쁘다고 실없이 웃고 감탄하다가 천천히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여즉 쿤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일부러 꽁꽁 숨겨두고 묻어두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번번이 타이밍을 놓쳤던 게 문제였다. 공방전의 상점에서 왕난과 함께 있던 누군가가 쿤이란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벅차오르는 감정에 휩쓸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그 이후로도 번번이 말을 꺼낼 틈이 없어 오늘까지 미루고 있었다. 제대로라면 쿤이 깨어있을 때 해야겠지만 이제와 말하자니 퍽 창피한 일이었다. 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 나중에라도 꼭 다시 말해야겠지만, 지금은 오직 자기만족을 위하여 밤은 고해성사를 하듯 그간 삼키고 삼켰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고마워요.”
그 폭발 속에서도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줘서 고마워요. 감히 말 하건데, 긴 시간동안 저를 위하고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쿤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어요. 너무 고마워요, 쿤 씨….
몇 번에 걸쳐서 고맙단 말을 반복했지만, 여전히 뭔가가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표현해낼 수가 없단 이유도 있었지만, 역시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했다. 잠든 이를 향해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턱이 없었다.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하더라도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다. 찰리가 없다. 하얀 얼굴 위에서 잠시 멈칫하며 머뭇거리다가, 꼭 무언가에 홀려버린 양 감정에 휩쓸리며 밤은 눈을 내리 감고 쿤의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누구보다도 고맙고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 감사와 애정을 담아.
겨우 닿았을까. 이게 입맞춤인지 스쳐지나가는 것에 불과한지 모호할 만큼의 아주 살짝 닿은 게 전부였다. 반듯한 이마와 맞닿은 얇은 피부를 타고 오르는 온기는 무척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닿고 있는 이 온기의 따스함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었지만 이젠 떨어져야 했다. 이런 기회는 또 없을 텐데, 라며 아쉬움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눌렸던 무게가 사라지자 끼이익, 스프링이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희미한 소리였지만 마치 천둥처럼 밤을 후려쳐왔다. 방금 전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순식간에 깨달으면서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면서 그를 내려다봤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것도 자고 있는 사람에게.
잠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깨어나질 않는 쿤의 얼굴을 보다가 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감에 머리카락이 뾰쪽 곤두서는 느낌이다. 분명 방에 들어왔던 목적은 쿤을 위해서였는데, 그러기는커녕 감정만 왈칵 쏟으며 그에 휩쓸려 스스로도 예상지 못한 행동을 저리고 말았다. 깨어있지 않아서 다행이지, 지금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힘들다. 뭐하는 짓인가, 대체. 엔도르시 씨에게 뺨에 입맞춤을 받았을 땐 별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낯이 뜨거워졌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어떻게든 긍정적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고를 틀었다. 뽀뽀야, 뭐, 친구들 사이에서도 할 수 있는 거라잖아. 지나가던 열에 아홉은 미쳤냐고 소리지를법한 소리였지만, 밤은 분명 그럴 거라며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스스로와 타협하기에 바빴다. 고기를 굽기 시작하면 그때 다시 깨우러 오자고, 도망치듯 방 밖으로 휙휙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나왔는지 모를 만큼 허둥지둥 방밖으로 나왔던 것 같다. 문까지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하고 나서야 후아, 막혔던 것 같은 숨을 몰아쉬는데 바깥은 여전히 요란스럽다. 설마 아직도 숯이 해결되지 않은 건가? 난감하네, 이러다간 바비큐는 물 건너 갈 거라고 아쉬워하는데 “뭐하는 거예요? 비켜 보세요!” 하는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 맞게 외출했던 이화가 돌아왔나 보다. 다행이네, 생각하면서 어쨌든 자신도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멈춰서고 말았다. 현관 앞에 서서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검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입술을 더듬듯 매만져봤다. 불을 당기 듯, 얼굴마저 뜨거워졌다.
―입술에 닿아왔던 온기는 분명 보드라웠을 텐데, 남아있는 열기는 아릿하고 뜨거워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볼 라이트의 빛은 마지막과는 달리 은은한 흰 빛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희미하게 비춰지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쿤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고. 십년감수란 사자성어가 이럴 때 사용되던 거였던가. 외출했다던 이화가 돌아왔는지, 오오, 불붙었다!! 과연 화염차!! 라는 분명 집 바깥일 텐데도 한 치의 뭉개짐 없이 또렷이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소란스러웠다. 하여간 목청들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는 웃자는 식의 소리를 늘어놨지만 도저히 가슴 속이 진정되질 않았다. 저 녀석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제 두근거림보다 더 할 리가 없었다. 겨우 이마에 뽀뽀 받은 것 가지고 이런다니 주책이다. 한심하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듯 말했지만 역시 소용없는 일이라, 쿤은 마음을 붙잡는 걸을 포기했다.
눈을 뜨지 않은 게 정말로 천만 다행이었다. 그 상황에서 눈을 떴다간 무슨 상황에 직면했을지 상상은 할 수 있어도 대처할 자신이 없었다. 그 이전에 밤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호흡마저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말이지. 한심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온 몸을 두드려오는 고동소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가장 확실하게 느끼고 있으면서, 믿겨지지 않는지라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손으로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려봤다. 손바닥 아래로 얇은 피하지방과 근육과 뼈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심장이 쿵, 쿵, 거리며 빠르게 뛰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쳐버리도록 벅찬 울림을 느끼면서 쿤은 천천히 숨을 몰아내 쉬었다.
밤이 방에 들어왔을 즈음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뒤였지만, 도저히 움직이거나 눈을 뜰 수 없었다. 감겨져 있던 눈꺼풀 너머로, 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아득하게 그려졌다. 제 이마에 닿기 전 흩뿌려지던 얕은 밤의 숨결에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불러버릴 뻔했다. 어찌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감정에 휩싸였다. …고작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댄 것뿐인데, 그게 대체 뭐라고. 가슴을 쓸던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그리 툴툴 거리다가, 「…고마워요.」라고 제게 속삭여왔던 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쿤은 입술을 꽉 악물었다.
“……젠장. 반칙이잖아, 밤.”
적어도 제대로 깨어 있을 때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무엇의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의 모든 것들을 포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손이 덮고 있는 게 전부인데도, 입술이 닿아왔던 이마에 남아있는 온기가 아프도록 뜨거웠다.
*아침에게 인사해 와 이어지는 연작입니다.
For.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