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7일꿈
봄이다. 난 봄을 좋아한다. 나른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걸었다. ‘봄’하면 떠오르는 건 다양하다. 사전적인 의미를 늘여놓는 재미없는 짓을 하기보단, 허밍을 부르듯 떠오르는 대로 유쾌하게 나열해보기로 했다.
봄. 한자로는 春. 영어로는 Spring. 사계절 중 가장 첫 번째 계절. 막 솟아오르는 연두색 새싹. 봄꽃. 춘곤증 등등. 혼잣말처럼 살짝 오므린 입술로 종알거리며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심하지 않게 울퉁불퉁한 도보 위를 경쾌하게 걸었다. 어디서 굴러온 건지 모를 작은 돌이 보였다. 흥에 겨워서 운동화 코로 툭 걷어찼다. 딱딱딱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굴러다가 멈춘다. 다시 또 걷어찰까 하다가 도보가 끝나고 나타난 아스팔트에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아 다시 도보가 이어지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곳과는 달리 무척 깨끗하고 반듯했다. 아주 낮은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팔랑팔랑 코앞을 스쳐지나가는 작고 하얀 꽃잎처럼 마음도 붕 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나무길이 시작됐다. 걷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하늘의 구름처럼 풍성하게 피어난 꽃들 사이로 빛이 반짝반짝 부서진다. 향긋한 꽃향기가 기분 좋다. 근사한 분홍색 꽃나무 터널은 이 계절 무렵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길목이다. 지금은 심부름 중으로, 이 길을 쭉 따라 내려가 보면 최근에 지어진 대형마트가 나온다. 매년 이 길목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대포를 연상시키는 길고 커다란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나, 또는 아담한 사이즈의 디지털 카메라, 그도 없으면 핸드폰에 내장되어 있는 카메라로 꽃이나 거리, 그리고 사람을 찍는다. 사진작가. 가족. 부부. 연인. 친구끼리. 덕분에 이 길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지금만 해도 사람들이 참 많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한다. 활기가 넘치고 늘 즐겁다. 정말 많을 때에는 장날의 시장바닥을 연상시킬 만큼 시끌시끌하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찾아오다보니 내리막길부터는 도보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잘 짜인 카펫처럼 밝은 붉은색의 벽돌들은 지그재그로 교차되며 쭉 뻗어 내려간다. 올 초부터 부지런을 떨더니 벚꽃이 완전히 개화하기 딱 며칠 전에 도보정리가 끝났다. 정말 잘 된 일이다. 어딘가 걸릴 일 없이 깨끗하니 보행자로선 기분 좋다. 작년에 해거리를 했던 탓일까. 올려다본 벚꽃은 무척이나 풍성해서 폭신폭신해 보였다. 올해는 무척 화려할거라던 부모님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휴일인 겸 부모님과 함께 지낸다. 달랑 셋뿐이지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저녁 후엔 함께 벚꽃구경을 하러 나오기도 했다. 최고의 주말이다. 걸쳐 입은 얇은 카디건 주머니 속에는 부모님이 주신 신용카드가 얌전히 자리를 잡고 있다. 아직 시간이 있지만 저녁 찬거리와 간식을 사오기로 했다. 혹시 몰라서 장 목록을 꺼내 쭉 살펴봤다. 생각보다 사야할 품목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시 목록이 적힌 종이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는데, 확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위의 꽃구름이 춤을 췄다. 아직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작은 꽃잎들도 간간히 흩날린다. 충분히 멋있고 근사해서 탄성을 내뱉었다. 예쁘다. 떨어지는 꽃잎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누가 그러던데, 그해 피어난 벚꽃잎을 한 번에 잡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고.
이 무렵의 소녀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학업만큼이나 중요시하게, 혹은 그 이상이다. 두근거리는 로맨스를 한번이라도 꿈꾸지 않은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없었다. 친구인 은미는 벌써 1년 째 짝사랑 중이다. 공학이다 보니 누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더라 얘기는 많았지만, 은미 같은 경우는 보기 드물다. 상대는 1학년 때의 부반장으로 봄에 무슨 일이 있는 이후로는 쭉 올곧은 상태다. 대단하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 넘치는 친구는 부반장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작아진다. 그 모습이 귀엽고 안타까워서 깔깔 웃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올해는 꼭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워낙 털털한 성격이어서 방금 자신이 생각한 그런 설은 잘 모를 것이다. 이참에 말해줄까? 깡충깡충 뛰면서 벚꽃 잎을 잡으려는 친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잘 가다가 빵 웃어버리면 그것처럼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딱 좋은 일도 없다.
손으로 입을 막은 것도 부족해서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벚나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분명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우스워졌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입을 막고 있어서 비명은 터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만큼 놀랐다. 처음엔 쓰레기봉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사람이었다. 그것도 머리. 히익-! 너무 깜짝 놀라서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나 도보를 내려서자, 주변을 지나쳐가던 사람들 중 몇몇이 자신처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으악, 뭐야! 각양각색의 반응이지만 공통적인 건 놀랐다는 거다. 벚꽃에 시선이 팔려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한 모양이다. 이런 소란에도 벚나무 사이의 풀숲에 누워있는 남자는 꼼짝하지 않는다. 시체일리는 없겠지만 너무 놀라서 도망치듯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달음박질로 금방 대형마트 앞에 도착했다.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요즘 시대의 학생들의 표본처럼 고작 이정도 뛴 걸로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너무 놀란 탓도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숨을 고르다가 방금 전 봤던 것을 떠올렸다. 민망함이 몰려들어왔다. 창피해라. 그래도 그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놀랐으니 나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뭘까? 왜 그런데 누워있는 걸까. 사야할 물품들을 사면서 궁금증에 휩싸였다. 간식거리도 두 가지 정도 더 샀다. 휴일이라고 은미가 놀러온다고 했다. 아마 둘이서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 과자를 먹어치울 예정이다. 마트에서 나왔을 때는 큰 봉투에 식품들이 가득이다. 많이 무겁지 않아서 한 팔에 끼우고 툭툭 걷다가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있을까? 가까이 다가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멀리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살폈다. 아직도 있다.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부스스한 머리통은 풀숲에서 도보를 향해 삐죽 나와 있다. 아까 전과 똑같은 상태다. 그야말로 부동이다. 샌들을 탁탁 끌며 그 위로 걸어가 멈췄다. 그냥 지나쳐가도 되지만 풍부한 소녀의 호기심이란 쉽게 꺾을 수 없는 법이다. 풀숲에 아무렇지 않게 드러누워 있는 남자를 빤히 내려다봤다. 발소리가 들리던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혹시 자는 건가? 쓰고 있는 안경이 빛에 반사 돼서 잘 안 보인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도록 최대한 남자 쪽에 가까이 선 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바지가 좀 답답하게 끼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 위로 제 그림자가 약간 드리워졌다. 반응이 없다. 말끄러미 보다가 툭 물어봤다. 대답이 돌아오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궁금했다.
“있죠. 혹시 그쪽 시체에요?”
자는 거냐고 물어봐도 됐을 것인데 묻는 말이 저랬다. 내뱉은 말을 곱씹어보니 되게 예의 없고 웃긴 말이다. 멀쩡히 살아있으니 구급요원이나 경찰들이 몰려오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정말로 궁금했다. 꼭 시체처럼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임도 없다. 혹시 시체놀이 중? 다 큰 남자가 그런 걸 한다면 참 할 짓 없다고 제대로 된 잉여인간 취급을 하며 한심해 했겠지만, 그네들도 사람이니 엉뚱한 짓을 하고 싶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근데 왜 하필 이런데서 하는 거란 말인가. 풀리지 않는 궁금증만 자꾸 맴돌아 차곡차곡 쌓여간다. 질문을 하긴 했지만 답을 듣는 건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질문 자체가 어이가 없어서 무시하거나, 아니면 정말 자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침묵만 돌아오겠거니 여기고 실례란 걸 뻔히 알면서도 남자를 보다가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침묵을 깨고 성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한테 시체냐고 묻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나요.”
퍽 친절한 대답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럼 그러고 누워있는 그쪽은 뭐냐고 되묻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 지나쳐갔을 때와 조금도 자세가 변하지 않았고. 근데 존댓말이라니. 의외다. 데구르르 눈을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러고 있었잖아요. 안창피해요?”
“딱히.”
상관없다는 태도다. 길 한복판이 아니어서 그런 건가. 이 남자와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들여다봤다가 깜짝 놀라거나 웃는다. 쪼그려 앉아있자 50대 중년 아저씨가 옆으로 슬쩍 봤다가 누워있는 이 남자를 발견하곤 으악 비명을 지른다. 귀가 따갑다. 가래가 낀 목소리여서 더 그랬다. 장소가 문제일 뿐, 멀쩡히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지르곤 웬 미친놈을 다 봤냐고 욕을 하며 제 갈 길을 간다. 풀숲에 누워있는 걸로도 미친놈 취급 받는다. 요즘 세상 참 삭막하다더니. 이렇게 누워있으면 욕먹기도 미친놈 되기도 쉽다.
고막엔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 그 소리가 나름 효과는 있었던 건지 묵묵히 한 자세를 고수하던 남자가 드디어 머리를 베고 있던 팔을 움직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아무렇게나 휘젓는다. 가뜩이나 부스스 하던 머리가 더 엉망이 된다. 동화에서 나오는 마녀의 빗자루처럼 온통 산발이다. 와, 심하다 심해. 먼지가 폴폴 날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뒤로 빼며 인상을 썼다. 그나마 기름이 졌다거나 하지 않아서 혐오감이 들진 않았다. 여자애가 보는데도 남자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태연하다. 왜 여기에 있어요? 벚꽃 좋아해요?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건조하고 짧은 단답형뿐이었다. 한참을 묻다가 지쳐서, 입을 꾹 다물고 질문 대신 찬찬히 남자를 훑어봤다.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올리고, 감청색 청바지에 삼선 슬리퍼. 그야말로 자유인의 표본에 가까웠다. 백수라도 이러긴 힘든데. 뚫어져라 보는데도 시선 한통 주지 않는다. 뭘 보는 걸까 고개를 들었다. 계란 노른자처럼 동그란 태양이 길게 늘어진 벚꽃가지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꽃가지가 흔들리면서 빛이 쏟아진다. 생각보다 괜찮아서 탄성을 내뱉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네?”
“초면에 이것저것 묻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훑어봐지는 거, 그리 썩 기분 좋진 않네요.”
“……”
잠시 남자의 말을 곱씹다가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불한당 취급을 당했다. 그 취급에 화가 나서 괜히 눈에 힘을 주고 남자를 노려봤지만 남자는 여전히 부동이다. 너무 태연해서 기분이 더 일그러졌다. 흥. 자기가 뭐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네. 죄송합니다. 사과를 건네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홱 돌아서선 다시 낮은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탁탁 샌들 끌리는 소리가 기분을 말해주듯 소란스럽다. 칫. 그렇게 누워 있으면 누구든 궁금해 할 법하잖아. 투덜투덜 거리면서 걷다보니 금방 언덕을 올라와 아파트 정문에 도착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도어 락을 꾹꾹 온 힘을 다해 누르며 풀다가, 아차 했다. 삑- 잠금이 풀리면서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은 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를 어째. 이유 없이 화가나버려서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 그만 이름을 묻질 않았다. 닫히려는 유리문 안쪽으로 서둘러 들어간 뒤 정문 쪽을 응시했다. ―그를 처음 만난 휴일이었다.
*
미친 듯이 준비를 하고 튀어나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분명 지각이다. 운동화를 급하게 신었다가 하마터면 핸드폰을 두고 나갈 뻔 했다. 신발을 신은 채 엉금엉금 무릎으로 기어 거실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미리 현관문 앞에 던져놨던 책가방까지 손에 들었다. 세수를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책가방과 핸드폰을 챙기는 것까지 10분 만에 등교준비를 끝냈다. 뛰기 편하도록 늘 구겨 신던 뒤꿈치를 싹싹 펴 발을 제대로 끼우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래서 월요일은 싫다. 온 몸이 무겁고 졸리고 피곤하다. 그런데도 일어나 바쁘게 뛰어 등교해야한다. 꿀 같던 어제의 휴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월요병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장난 아니다. 판다가 형님! 하고 달려오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밤늦게까지 채팅 어플로 은미와 얘기를 했던 게 문제였다. 낮에 그만큼 수다를 떨었는데도 한참 부족했던 모양이다. 질리지도 않게 붙어 다니는데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던 걸까, 우린. 그래도 다음날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평소 기상시간보다 15분 더 훨씬 늦게 기상했다. 다섯 번째 울린 알람소리에 간신히 깰 수 있었다. 평소엔 느긋하게 걸으면 무사통과였지만 오늘은 바쁘게 뛰더라도 어찌 될지 상상이 안 간다.
휴대용 스킨크림을 가방에서 꺼내 얼굴에 치덕치덕 펴 발랐다. 얼굴에 바르는 건 이걸로 끝. 어른스럽게 저를 꾸미고자 화장을 하고 싶어 안달 난 또래 애들과는 달리 그런 걸 귀찮아하는 편이었다. 평소 그 귀찮아하던 것을 못마땅해 했는데 지금은 정말 잘됐구나 싶었다. 얼굴 다음으로는 끝이 물에 젖어서 뭉쳐있는 뻗친 어깨를 간신히 덮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 단발은 안 된다. 반곱슬이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늘 엉망이다. 서둘러 빗었는데도 이 모양이다.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나마 나오기 전에 머리카락에 물을 묻히길 잘한 것 같다. 대충 손으로 삭삭 빗어서 뻗친 걸 좀 가라앉히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총알처럼 쌩 튀어나와선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어서 교문이 닫히면 정말 피곤해진다. 주임 선생님은 정말 엄하고 가차가 없기 때문에 운동장을 두 바퀴나 뛰어야 한다. 게다가 담임 선생님에게도 걸리면 그날 하루가 고달파진다. 가뜩이나 요즘 시험기간이라고 제대로 각 잡고 계셨기 때문에 더하다.
서둘러 언덕 아래를 뛰어 내려가자 다리가 제 다리가 아닌 것 마냥 마구 움직인다. 이러다가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질 것 같아서 내려갈 때에는 좀 속도를 줄였다. 언덕길을 내려가다 보니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또 여기 있을까? 어제 식사 이후 부모님과 함께 은미를 배웅하면서 나왔을 때에도 그 남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이른 시간 아니던가. 등교하는 학생들과 어른들이 바쁘게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있을 뿐이다. 치맛자락이며 머리카락이며 정신없이 흔들렸다.
바쁘게 뛰는데 어제 그 지점 즈음, 익숙한 머리통이 보여 왔다. 그걸 발견하자 기분이 멍해졌다. 헐. 기가 막혀서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진짜로 그 사람인건가 싶었다. 그 의심은 점점 가까워질수록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제와는 좀 달라도 비슷한 차림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백수라도 저렇게 부지런하진 않다. 뛰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그 위에 멈춰 섰다. 얼굴을 내려다보니 어제와 다른 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쓰고 있던 안경은 어디에다가 내팽겨 쳤는지 오늘은 맨 얼굴이다. 발소리가 들려서인지 눈을 뜬다. 안경을 쓰고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굉장히 차분한 인상이다. 신기하다. 눈이 마주치자 좀 더 고개를 위로 든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아침 그늘이 진 탓에 올려다보는 눈이 새카맣다. 아몬드 모양의 예쁜 눈이 깜빡거린다. 올려다보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멍하더니 뭔가 떠올랐단 얼굴로 변한다. 다행이다. 그래도 기억은 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 내숭 떨지 않고 온 얼굴로 씩 웃으니 남자가 먼저 말해왔다.
“교복이네요.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그런 그쪽은 백수에요?”
“아뇨. 대학생이요.”
말도 안 돼.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붙잡았다. 대학생인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냔 말이다. 대학생들은 바쁜 거 아니었어? 의심어린 눈초리로 노려봐도 남자는 변함없는 얼굴이다. 왼쪽 눈썹을 까딱 거리다가 어제 일을 떠올렸다.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묻지 못했는데. 그쪽 이름은 뭐에요? 전 하영이라고 해요. 외자에요. 고2 구요.”
“외자라, 특이하네. 이진영. 스물 하나.”
3살이나 연상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더 있는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어제도 느꼈던 거지만 참 성실하고 심플한 대답이다. 역시 외자가 보기 드물어서 그런지 그도 비슷한 반응이다. 뭐, 이름 외우기 쉽잖아요. 그렇죠? 방긋방긋 웃으며 물으니 떨떠름하게 보던 그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자의 반응을 보며 혓바닥 위로 데굴데굴 그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이진영, 이진영. 혹시라도 이름을 까먹을까 싶어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정말 늦어버릴 게 분명했지만 무릎을 약간 덮는 치마를 두 손으로 꾹 누르고 버티며, 오늘도 어김없이 풀숲에서 뒹굴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저기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되요? 아, 일단 오빠라고 불러도 되려나.”
“마음대로.”
“진영 오빠. 말투가 원래 그래요?”
“네.”
“…네에.”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기왕 이리 만난 거 더 물어볼까 했지만 교복 치마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울었다. 깜짝 놀라서 꺼내보니 문자가 와있다. 잠금을 풀어 내용을 확인해봤다. 은미다. 내용을 보고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너 어디야!! 담임 왔다고!!」. 요란한 사이렌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맙소사. 시간을 확인해보니 늦었다. 죽어라 뛰면 아마 교문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교실까진 장담할 수가 없다. 늦었다고 비명을 지르며 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깐 돌아서보니 놀란 얼굴로 상체를 일으키고 이쪽을 보고 있는 진영이 보여 왔다. 하긴 냅다 도망치듯 뛰는 꼴이니까. 잠깐 멈춰서 뭐라고 할까 고민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로 했다. 지각은 지각이더라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쥔 손을 머리위로 높이 들어 올려 흔들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진영 오빠!”
지각으로 정신없는 아침, 그를 다시 만났다.
*
쪼록, 음료수 팩에 꽂힌 빨대를 힘차게 빨았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사각형 종이팩에서 유백색의 액체가 빨대를 타고 올라와 입안에 가득 고였다. 달콤한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점심시간 직후 매점에서 사먹는 음료수는 참으로 맛있다. 이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배가 불러 나른한 기분으로 음료수를 마시며 교실 창문에 매달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교실 커튼이 춤춘다. 이대로 자버린다면 최고겠지만, 안타깝게도 교실의 요란함은 허락해주질 않는다. 운동장엔 식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뛰어다니는 이들도 있었고, 나가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교실에서 담임에게 허락받고 열은 컴퓨터로 이것저것 구경하며 놀거나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교실 뒤쪽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우리 반으로 몰려온 2학년 응원부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상태다.
실업계여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는 부활동이 되게 활발하다. 특히나 응원부는 굉장했다. 새 안무의 최종단계를 다듬고 있는 2학년 응원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은미가 앞에서 이리저리 팔 동작을 하며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네들이 우리 반에 모인 이유는 은미가 부단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든 중심축이 있으면 그쪽으로 몰려가기 마련이다. 그녀들의 연습과정은 굉장히 격렬하고 열심히 하는데다가 재밌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다. 반 애들도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싫어하지 않은 기색이다. 오히려 반기는 편이었다. 그런 이유 탓에 점심시간엔 곧잘 응원부들이 우리반에서 연습을 한다. 게다가 오늘은 단복까지 챙겨 입고 있었다. 오후에 축구 리그전이 있어서 점심시간이 끝나면 곧장 간다고 했다. 원래는 선두에 단장이 서지만 이번에 사고가 있어 왼팔을 다쳤기에 은미가 앞장서서 이끌게 됐다. 단장인 3학년 선배는 왼쪽 팔에 기브스를 한 채 의자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마지막 동선을 정리하고는 가볍게 폴짝 뛰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은 은미가 웹서핑을 하던 반애에게 음악을 틀어 달라 부탁한다.
책상이 전부 앞자리로 밀려 교실의 절반이 텅 비었다. 좀 좁게 서서 그렇지 움직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음악이 시작되자 부지런히 각자 위치를 찾아가더니 이윽고 시작되는 가사에 팔과 몸을 흔들며 뛰기 시작한다. 단복까지 차려입고 와서 연습을 하는지라 다른 반 애들까지 몰려와서 교실은 온통 혼잡하다. 다음 수업을 위해 일찍이 올라와있던 선생님들도 구경하고 계셨다. 점점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달해갈수록 폭발적인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로 격렬한 춤사위가 벌어졌다. 여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는데도 힘이 엄청났다. 전원이 동시에 크게 움직이는 동작이 나오자 오오, 하는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온다. 과연 우리학교 응원부. 지역구 응원 1위를 괜히 먹는 게 아니다. 은미 혼자서 대충 이런 춤이라고 보여줬을 때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군무로 보자니 느낌이 색다르다. 오싹오싹한 전율도 일 정도였다. 연습하는 걸로 힘을 몽땅 뺄 수 없으니 적당히 하는 편이지만 역시 굉장하다. 짧은 곡이어서 금방 한 턴이 끝났다. 구경하던 학생들이 하나같이 박수를 치면서 그녀들을 응원한다. 유쾌한 소란스러움이다.
헥헥 숨을 몰아쉬던 은미와 눈이 마주쳤다.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표시하는 친구의 모습에 까르르 웃으며 그녀에게 엄지를 척 치켜들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서 있던 춤에서 발견한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얘기하고 있는 그녀들을 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교실이 2층이다 보니 키가 큰 벚나무가 보여 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아서 창문을 붙잡고 앞으로 몸을 빼는데 은미가 너 뭐해!! 라는 비명과 함께 치마를 덥석 잡아왔다. 하마터면 치마가 벗겨질 뻔 했다. 도로 안으로 쑥 들어오면서 꺅, 변태! 소리치며 웃었다.
“에이. 걱정 마. 안 떨어져.”
“지금 네가 네 꼴을 못 봐서 그래. 이러지 마라 친구야, 이 언니 심장 약한 거 모르니. 난 아직 친구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심장 약하다면서 선배대신 선두에 서는 거야? 우와~”
“비꼬지 말고!”
“그러는 거 아냐. 알겠으니까 치마 놔주세요. 이러다 진짜 벗겨지겠다고.”
교실에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있다. 여기서 치마가 벗겨지면 학창시절 최고의 흑역사이자 가장 쪽팔린 기억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러자 빤히 내 얼굴을 보던 은미가 씨익 웃는다. 그리곤 에잇, 벗겨버리자!! 라며 달려든다. 으악 비명을 질렀다. 이놈의 친구가 사람을 잡네!! 은미는 나보다 훨씬 키도 커서 이겨낼 수가 없다. 치마를 꽉 붙잡고 꺅꺅 거리다가, 아래쪽에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잘못 본건가 싶어서 좀 더 내다봤더니 눈이 마주쳤다. 묵묵한 얼굴로 살래살래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다. 그 모습에 너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든 말든 한번 손을 흔들어주고는 등을 돌려버리는 그의 모습에 버럭 불러재꼈다.
“진영 오빠---!!!”
그 외침에 나를 붙잡고 장난을 치던 은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본다. 은미 뿐만 아니라 반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한번쯤 내게 시선이 쏠렸지만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바깥의 남자를 봤다. 다시 돌아보는 그에게 팔을 붕붕 흔들었다. 그런 내 모습에 어쩔까 고민한다 싶더니 계속해서 팔을 흔드는 내 모습에 알았다는 듯 다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준다. 설마 여기서 만날 줄 몰랐던 지라 활짝 웃자 은미가 왼쪽 어깨에 턱을 척 올려왔다.
“저 사람이 네가 말하던 그 오빠야? 생각보다 괜찮네.”
“어제까지만 해도 되게 부스스 했는데. 저렇게 입은 건 처음 봐.”
“흐응, 그렇다 이거지.”
가늘게 눈을 흘겨 뜨며 진영을 본다. 그 모습이 이상해 왜 그런 눈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을 뿐이지만 궁금해서 빤히 은미를 봤다. 말없는 대치가 이어지는데 아까 제 외침에 놀라 창가 근처로 다가온 단장 언니가 바깥을 내다보고는 어라?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충격적인 말을 했다.
“어? 저 사람, 우리 학교 졸업생이잖아.”
“진짜요?!”
“응. 학생부인데다가 마스크도 좋아서 동 ․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았어. 나도 몇 번 만나봤고. 되게 재미없는 사람이었지만.”
몰랐구나, 너네? 아, 하긴 알 턱이 없겠다. 너희 입학했을 때 저 사람은 졸업했으니까. 단장의 말에 은미와 둘이서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가 우리 학교 졸업생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삼일 째 정오였다.
*
고등학생이라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한다는 게 전반적인 인식이었지만, 자율학습이란 것은 학생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해지는 것으로서, 그걸 선택하는 건 학생의 권리며 자유이니 강제로 하라고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라는 담임을 향한 2학년 2반 전원의 필사적인 반항의 결과, 하교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더 공부하고 6시 무렵에 돌아가는 쾌거를 거둘 수 있었다. 6시부터 야자실이 열리기 때문에 더 공부를 하고자 하는 애들은 학습실로 올라가고, 동아리가 있는 애들 역시 각 서클로 빠져나간다. 이도저도 아닌 학생들은 전부 귀가부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은미와 함께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은미가 동아리 활동이 있다고 해서 혼자 돌아가게 됐다.
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다보니 어느덧 음악의 박자에 맞춰 걷게 된다. 빠른 박자에 맞추더라도 곡이 바뀌면 느려지기도 한다. 은미와 함께 갈 때에는 끝도 없이 얘기를 하거나 혹은 시내에 들려서 간식을 사먹거나 필요한 용품을 사서 돌아가기 때문에 음악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혼자 갈 때에 음악은 필수다. 핸드폰에 들어간 음악은 다양하다. 빠른 비트 사운드에서 여유로운 발라드, 또는 느릿하거나 경쾌한 BGM까지. 랜덤으로 돌리기 때문에 걷는 속도도 굉장히 제멋대로다. 이건 나름의 하굣길의 룰이자 혼자서 즐기는 게임이었다. 자고로 인생은 유쾌하고 즐겁게 살라고 하지 않던가. 가사를 제대로 부르기 보단 음만 흥얼거리며 걷다가 앞서 걸어가고 있는 어느 남자의 뒷모습에 활짝 웃었다.
뒷모습만으로도 누군지 척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제 봤던 옷차림하고는 달랐지만 그래도 앞선 이틀보단 훨씬 깔끔한 차림이었다. 빗자루처럼 부스스한 머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다. 그런데 저런 옷차림에서도 삼선 슬리퍼는 여전히 고집중이다. 누워있을 때라던가 어제 학교에서 봤을 때에도 잘 몰랐는데, 약간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다닌다. 킥킥 웃었다. 마트에서 뭔가를 사서 돌아가는 걸까. 오른손에 대형마트의 로그가 프린팅 된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마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껐다. 이어폰이 엉키지 않도록 손가락에 돌돌 감아 정리한 뒤 핸드폰과 함께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흐읍- 크게 심호흡을 하곤 그에게 뛰어갔다. 거리가 거의 좁혀졌을 무렵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가볍게 그의 등을 툭 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놀란 얼굴로 휙 돌아보더니, 제 얼굴을 보곤 표정을 풀었다. 아아-나지막한 탄성을 내뱉는다.
“하영이네요. 안녕.”
“와, 이름 기억하시네? 잘 지내셨어요? 또 꽃구경?”
“뭐, 네. 장도 볼 겸… 하영은, 하교중인가?”
“넵. 보시다시피 하교 중입니다!”
“참 씩씩하네요.”
전 지루해서 굴러다니는데. 신기하다는 듯 재미있다는 말투로 중얼거리며 빤히 봐온다. 그 말에 지금은 안 굴러다니고 멀쩡히 잘 걷잖아요. 라고 대답하자 그도 그러네요. 라는 멍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도 키가 결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진영은 훨씬 더 컸다. 덕분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볼 정도다. 이렇게 키 차이가 날 줄이야. 은미라면 아마 괜찮게 잘 섰을 것 같단 생각을 해본다. 은미 만큼이나 더 컸으면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달랑 1cm도 크지 않았다. 벌써 성장 판이 닫힌 걸까. 누구에요, 여자는 26살까지 큰다고 말했던 사람. 고1 때부터 변함없이 유지되는 키에 대해 어찌 설명해보실거냐고 묻고 싶다. 뚱하니 있자 진영이 왜 그런 웃긴 얼굴로 있냐고 물어온다. 웃긴 얼굴이라니… 내 얼굴이 어떤데요? 궁금해서 물으니 거울이 없어서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란다. 오죽하면 사진이라도 찍어줄까요? 라며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드는 진영이다.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다. 어느새 둘이서 가로수 아래를 걷고 있었다. 주홍빛에 약간 어둡게 물들여진 꽃터널이 바람에 춤춘다. 벚꽃 잎들이 팔랑팔랑 흩날렸다. 화사하게 만개한지 고작 사흘 쯤 됐는데 제법 많이 흩날린다. 진영과 나란히 걸으면서 이것저것 얘기를 했다. 아마 이때가 그와 최고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어제 학교에서 봤을 때와는 딴판이라고 하자 느릿하게 그런가요- 말끝을 길게 늘인다. 말투가 뭐 그러냐며 깔깔 웃는데 진영이 저를 불러온다.
“그런데 말이죠, 하영.”
“응?”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진영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안경을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둘째 날 가까이에서 봤던 예쁜 눈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빤히 올려다보자,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낯선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어른들 말 몰라요?”
“아뇨. 잘 아는데요.”
“아는 사람의 행동이 아닌데. 너무 스스럼없잖아요.”
아무리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러기는 힘들다고요. 처음에도 그렇고, 보통은 피하기 마련이에요. 그 아저씨처럼.
진지한 진영의 말에 첫날을 떠올렸다. 음. 확실히. 그의 말처럼 너무 스스럼없이 그를 대하긴 했다. 친화성이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 어째서 그랬던 걸까? 지금 이렇게 생각해보니 스스로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금방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죠, 오빠.”
“네.”
“이제는 서로 알잖아요. 서로의 이름이라든가 나이도. 그리고 이렇게 얘기도 나누고 있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요?”
“……”
너무 억지 논리인건가? 아무런 말없이 빤히 보는 진영을 보며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계절이 바뀌면서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발 아래로 따라붙고 있던 그림자도 해와 함께 길어졌다. 그런 그림자처럼 샐쭉이 웃었다. 옅은 하늘은 어느새 짙은 오렌지색으로 곱게 물들여져있다. 그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흘째 황혼 무렵이었다.
*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금방 밤이 찾아왔다. 베란다로 통하는 방의 창문을 열어놓고 창턱에 걸터앉았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시원하다. 텁텁하던 공기가 밀려나고 시원한 바람으로 가득 찬다. 공부하느라 복잡했던 머리가 좀 식는 느낌이다. 기분 좋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잠깐 눈을 감고 맞다가, 공부하느라 묶어놨던 머리를 풀었다. 끈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풀어지지 팔라고 세게 묵어놨더니 이 꼴이 났다. 손으로 머리를 휙휙 빗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부지런히 공부해야하는데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산들산들 가벼운 봄바람처럼 마음도 붕 뜬다. 이런 계절엔 놀러가야 하는데 왜 하필 시험일까.
이러다가 시험 망치고 울지요. 찡찡 거리고 울지요. 채팅 어플로 이 말을 쳐서 보내자 몇 초 후, 「정신 차려 이 친구야.」란 메시지가 날아왔다. 깔깔 뒤집어졌다. 몸을 옆으로 굴려 바로 붙어있는 침대위로 누웠다. 푹신푹신하게 몸을 받아오는 느낌이 좋다. 아까까지 외우고 있던 영어 단어를 중얼거리며 곱씹어 봤다. 몇 개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외웠는데 왜 떠오르질 않느냔 말이다. 암만 외워도 쉽게 머릿속에 박히질 않는다. 답답하다. 뭐였더라. 핸드폰의 사전 기능을 이용해 단어를 찾아봤다. 몇 개를 쭉 짚어보니 스펠링이 꼭 하나씩 틀린다. 나 고등학생 맞니? 채팅 중이었으면 ‘ㅋ’초성체로 신나게 도배했을 거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ㅠ’인가. 힘이 쭉 빠지는데 검게 변한 액정위로 알림창이 떴다. 은미다. 「간식이 고프다.」.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 몇 시더라?
책상 위의 알람시계를 보니 7시다. 저녁 식사 후 간식이 끌릴 시간이다. 굳이 뭔가를 먹을 필요가 없더라도 입이 심심해 무언가를 먹고 싶어진다. 괜히 은미의 말에 나까지 간식이 끌렸다. 뭐라도 먹을까 싶었지만 집에 간식이 없지 말입니다.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집은 텅 빈 채다. 막 해가 저물어서 가장 어두울 시간이다. 집안의 사물들도 잘 구분가지 않는다. 텅 비어있는 소리가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돌아왔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불이란 불을 꺼놨더니 검은 아가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착각이 든다. 정적 속에 푹 빠졌다. 방문 앞에 가만히 주저앉았다. 방의 불빛에 그림자가 앞으로 드리워진다. 불을 킬까. 얼굴도 형태도 없이 평면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려면 아직 멀었다. 게다가 오늘 늦는다고 했던 것 같다. 이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형태 없는 뭔가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온다. 결코 좋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은미한테 우리 집에 오라고 할 걸. 지금이라도 와달라고 해볼까?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켜 채팅 어플을 꾹 눌렀다.
「은미야」
「왜?」
「혼자 있으니까 뭐하다. 와주라ㅠㅠ」
「옹? 왜 혼자야. 아저씨랑 아줌마는?」
「오늘 늦어.」
「으구. 빨리 말하지. 알았어. 언니가 간다. 책도 챙겨간다?」
「응!」
흔쾌히 오겠다는 말에 만세를 외쳤다. 이래서 친구가 좋다는 거다. 은미는 반대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은미가 온다는 사실에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빨리 와달라고 칭얼거리자 마트에서 간식 사가게 나오란다. 냉큼 용돈이 빵빵하게 담긴 지갑을 집어 들었다. 옅은 분홍색 샌들에 발을 끼우고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 불을 켜고 나갈까 했지만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나오기로 했다. 돌아와서 키자. 층 버튼을 누르자 금방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 내려오다 보니 오늘도 길거리엔 어김없이 사람이 많다. 밤인데도 엄청나다. 벚나무 길 아래는 더 그랬다. 도보의 가로등 덕분에 밤에도 벚꽃이 잘 보여서 그런 걸까? 구름처럼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꽃은 보는 것만으로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딸깍딸깍 샌들을 끌며 걸었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서로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한눈을 팔고 있어서인지 정통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서둘러 사과를 하려고 고개를 앞으로 똑바로 들자 진영이 서 있었다. 와? 어벙벙한 말을 내뱉자 하영이었네요. 라며 진영이 저를 봐왔다. 신기하다. 자주 만난다. 반가워서 활짝 웃었다.
“또 만났네요. 이런 우연이!”
“그러게요. 저도 막 신기해하던 참이었어요. 근데 슬슬 시험기간일 텐데 돌아다녀도 되나?”
“친구가 우리집 오겠다고 해서 마중 나가던 중이었어요. 오빠는요?”
“밤벚꽃 보려고 나왔어요.”
머리위의 벚꽃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바람에 물결처럼 머리위의 꽃가지가 흔들린다. 꽃잎이 쏟아지자 와아- 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그것을 넋놓고 보는데 진영이 불러왔다.
“아. 하영.”
“네?”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벚꽃의 꽃말 알아요?”
“아뇨, 잘 몰라요. 오빠는 알아요?”
“네.”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한다. 그에 오오, 탄성을 내뱉었다. 나도 벚꽃을 좋아했지만 꽃말까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둘 만큼 소녀심도 아니고 말이지. 궁금해요? 되묻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꽃말도 알고 사는 이 시대의 감수성 소녀가 되어볼까 하는데 진영의 입이 열렸다.
“중간고사래요.”
“푸핫-!!”
빵 웃어버리고 말았다. 밤벚꽃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소란스러워서 대놓고 웃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진영의 다리 쪽에 딱 붙어서 쪼그려 앉았다. 풉, 큭, 킥, 푸힛, 푸흐흐!! 온갖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너무 크게 안 웃으려고 참느라 온 몸이 바르르 떨렸다. 눈물까지 찔끔 난다. 뱃가죽이 터질 만큼 크게 웃고 싶었다. 안되겠다. 조금 있다가 은미와 만나 집에 돌아가면 말해야겠다. 그리곤 둘이서 실컷 웃어재껴야겠다. 그렇게 웃기냐는 진영의 물음에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계속 이럴 수 없어서 흐으으읍, 숨을 들이쉬며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너무 웃어대는 내 모습에 진영이 한숨을 푹 내쉰다.
“정말 재밌어 하네요. 농담이에요. 순결, 담백, 정신의 아름다움이래요.”
“흐흐흐, 그, 그렇군요. 하, 재밌었다.”
“그래요?”
“응. 오빠 벚꽃 정말로 좋아하나 봐요?”
“네.”
간단한 진영의 대답에 야릇한 호기심이 들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내 질문에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꽃을 좋아하는데 이유라도 있어야 하는 건가요.”
“물론 그건 아니지만, 계기라던가 있잖아요. 예쁘다는 감상이라던가, 누군가가 떠오른다거나 막 그런 거.”
궁금했기 때문에 물었을 뿐이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진영이다. 엄청나게 유쾌해서 거리낌 없이 물었던 건데 혹시 실례였던 걸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건 아니라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리곤 아주 가볍게 대답했다. 그 가벼움에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좋아하던 사람이 벚꽃을 징그럽게 좋아했어요.”
“―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이 나이쯤 됐는데 없을 리가 있나요.”
“헤에…좋아하던 사람은 동갑? 아니면 연상?”
“연상이요.”
“그렇구나.”
헤에에, 길게 감탄을 내뱉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의 말대로 없을 리가 없지. 응. 당연하지 않는가.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이 남자도 누군가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그런데 막상 알고 나니 기분이 미묘했다. 어라, 왜? 스파크가 팍 튀듯 의문이 반짝 들었다. 그것이 이상했다. 미묘해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으응? 이상해서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지잉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확 날아 가버렸다. 「언니는 마트 앞에 도착했다! 먼저 사고 있겠다.」. 그 내용아 아차, 싶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근 들어 자꾸 깜빡한다. 특히 진영을 만날 때에는 늘 이런 패턴인 것 같다. 벌써 두 번째다. 그럼 친구가 기다리니까 가보겠다고 말하자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준다. 밤 산책 잘하세요, 인사를 하고 진영을 스쳐지나갔다. 총총 걸어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어디에 있느냐고 찾기도 전에 은미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이미 한가득 장을 본 상태였다. 과자나 음료수만 있는 게 아니다. 뭐라도 간단히 해먹을 생각인가 보다. 많이도 샀다고 감탄하는데 은미가 유심히 얼굴을 들여다봤다.
“왜?”
“얼굴이 이상해서. 혼자 있었던 게 그렇게 많이 우울했어? 우쭈쭈, 우리 하영이.”
“어?”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주는 은미의 행동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마트의 유리창에 비춰지는 제 모습을 보T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처럼 못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 말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헤헤 웃어버렸다.
조금 나아졌다 싶었던 마음이 우울하게 가라앉는 오일 째 밤이다.
*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혹시 또 몰라서 우산을 챙겼다. 설마 오겠어. 했는데 오후 수업부터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지며 하늘이 흔들리더니, 기어코 쏟아지고 만다. 장맛비를 연상시키듯 엄청난 기세였다. 그나마 하교 무렵이 돼서야 좀 나아지기니 했지만 결코 빗줄기가 약해진 건 아니다. 우산을 안 가져왔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등교할 때까지만 해도 쓸데없이 가지고 나왔나 했는데 귀찮더라도 가지고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나의 선견지명. 은미는 애초에 접이용 우산을 들고 다닌다. 같이 학교 할까 했는데 오늘도 일이 있다고 해서 혼자서 하교하게 됐다. 심심하면 채팅하란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학교를 나섰다. 접혀 있을 때에는 그저 심심한 까만 우산이었는데, 활짝 펴니 하얀 구름이 동실동실 떠나니는 화창한 파란 하늘이 존재하고 있었다. 날씨와 함께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조금 뜨는 것 같다. 이래서 나는 내 우산을 참 좋아한다. 날이 어둡고 비가 와서 우울하더라도 이걸 쓰고 있자면 금방 괜찮아진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길 빌었다.
하늘도 세상도 기분도 온통 잿빛이다. 분명 그토록 붕붕 떠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칙칙하다. 좀처럼 뜨지 않는다.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단순히 비가 와서 그런 걸까. 비에 떨어진 꽃잎들이 물줄기를 타고 졸졸 흘러내린다. 바람에 지는 게 아니라 비에 진다니. 바람에 흩날리는 게 훨씬 더 좋은데. 아쉽다고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옮기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진영이 보여 왔다. 느긋하게 왼쪽 어깨에 우산을 거치고 벚나무를 올려 보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벚꽃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덩달아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싫어하진 않았지만 저렇게 매일 나와 벚나무를 볼 만큼 좋아하게 된 거다. 멀리 서서 진영을 지켜봤다. 그러자 이번엔 저쪽이 먼저 알아챘다. 벚나무를 올려보던 진영이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이쪽을 봐온다.
“하교 중인가 보네요.”
“비, 오는데도 나와 계셨어요?”
“오늘은 학교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표정이 별로네요.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안 좋은 일이 있었냐는 말에 왠지 덜컹했다.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 진영의 얼굴에, 시선을 들어 머리위의 조각하늘을 한 번 보고, 잿빛으로 물들여진 하늘을 봤다.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그게-비가 와서요.”
이런 날엔 여러모로 축축 쳐지잖아요. 변명 같은 말을 서둘러 했다. 어색하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게 잘 둘러졌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영이었다. 하긴, 그렇죠.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영 기쁘지가 않다. 평소에는 내가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입을 꾹 다물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영 잔망스럽다. 장난치듯 우산을 톡톡톡 두드려온다. 시간이 흐르자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려고 한다. 점점 소리가 달라진다. 이러다가 오늘 비에 벚꽃이 다 떨어지겠네요. 진영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목소리여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참으로 많았다.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라 혀끝까지 밀려나온다. 하지만 목소리를 통해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단어들이 입안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삼켜지길 몇 번이나 반복한다. 몇 번 말을 하려고 용기를 내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혀를 움직였다.
“있죠, 진영 오빠. 어제 했던 얘기인데…좋아하는 분에게 고백했어요?”
최대한 잘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묻고 나니 후회했다. 왜 이런 걸 질문한 걸까. 참 쓸데없는 질문이다. 말해놓고 나니 마음이 더 우울한 색으로 물들여졌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꾹 물었다. 기분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린다. 답답함에 인상까지 슬쩍 쓰는데 벚나무를 올려다보던 진영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소리는 없었다. 이 나이대의 소녀라면 무릇 가지고 있을 호기심이라고 생각한 걸까. 민망해져서 혼난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운동화 코를 내려다 봤다. 빗물이 튀어서 온통 물 범벅이다. 어쩐지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눈에 힘을 꾹 주고 운동화 끝을 노려보는데, 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번에도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바로 뒤를 이어서 차였지만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다.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는다. 진영이 웃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그저 옛날 일이에요.”
무슨 의미일까? 잘 모르겠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도 영어단어를 외울 때처럼 좀처럼 머릿속에 인식되질 않는다. 옛날 일. 그가 한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멍하니 진영을 올려다봤다. ―그는 아직도 웃고 있다.
비가 쏟아지는 잿빛의 육일 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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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일주일 밖에 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쉽고, 그래서 아름답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었다. 난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렇게 예쁜데 겨우 일주일뿐이라니. 아쉽고 아쉬워서 이대로 계속 피어있기를 바라는 철없는 욕심을 부려보지만 시간은 흐르고 꽃은 진다. 일주일 밖에 가지 않다는 그 말을 증명하듯 요일의 한 바퀴를 빙글 돈 오늘. 비도 그친데다 날이 좋아서 일찍 집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지갑도 들고 나왔으니 간단한 간식도 사갈까 싶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구름처럼 풍성하게 피어있던 벚꽃은 눈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연녹색의 작은 잎사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울긋불긋하다. 도보 위며 거리며 온통 꽃잎 융단이다. 역시 어제 내렸던 비가 결정타였다. 난폭한 빗줄기에 잔뜩 두들겨 맞아 연약해진 꽃잎들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눈보라치듯 어지럽게 흩날린다. 눈이 쏟아지는 듯한 꽃비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예쁘다.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팔을 뒤로 넘겨 깍지를 꼈다. 스트레칭을 하듯 쭉 펴주자 온 몸의 근육들이 긴장됐다가 이완하기를 반복한다. 단순한 행동인데도 무겁던 몸이 한결 개운해진다. 한숨을 푹 내쉬곤 걷기 시작했다. 아침이 돼서야 비가 그쳤기 때문에 아직 하늘 구석엔 구름이 남아있었지만, 구름이 거둬진 하늘은 무척 깨끗하고 화창했다. 시원해진 공기에 쓸려 정신없이 떨어지는 꽃잎이 옷자락이며 머리칼에 걸린다.
샌들이 딸칵거리며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희미해도 아직도 진동하는 꽃향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으며 기억하려고 애썼다. 화창한 오전 햇살에 눅진하던 마음도 조금씩 뽀송뽀송해진다.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오늘은 썩 괜찮다. 코끝으로 떠오르는 봄노래를 흥얼거렸다. 웹을 돌아다니다가 스치듯 들었던 거라서 제대로 기억이 안 나지만 최대한 따라가 보려고 애는 썼다. 가사가 없이 멜로디만 이어진 곡이었는데, 누군가가 그 아래에 댓글처럼 달아놨던 말은 선명했다.
상처 입지 않고, 상처 입히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까?
제법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말이었다. 소중한 거라. 사람에게 있어서 소중한 건 굉장히 다양하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가치며 무게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경우엔 인간 관계였다.
가만히 멈춰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암전. 온통 어두컴컴해진다. 이러고 있자면 어둠위로 떠오르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가족, 은미, 반 친구, 선생님, 이웃집 사람들. 보통은 이정도 선이다. 그런데 최근 그 틀을 깨고 한 명이 더 생겨났다. 진영이었다. 좀 가물가물한 편이긴 했는데 어제 웃는 얼굴을 본 뒤로는 눈만 감으면 자꾸 어른거린다. 동시에 가슴도 가볍게 지끈거리고 아파왔다. 이 욱신거림이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다. 왜 진영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그를 안지 이제 고작 6일이 지났다. 첫인상은 되게 재미없고 엉뚱했다. 솔직히 아무렇지 않게 길가 풀숲에 드러누워 사람들이 보고 지나가는 걸 당당하게 여기는 사람을 두고 엉뚱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알고 보니 사고도 멀쩡하고 의외로 유쾌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고작 6일 밖에 알고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성격에 대해 논할 순 없어도, 지금까지 알아온 것을 종합하자면 적당히 지루해 하지만 성실한 사람이었다.
눈을 떴다. 환한 빛으로 물들여진 세상은 완연한 봄에 젖어있다. 겨울에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꽃잎이 흩날린다. 정신없고 어지러워서 가볍게 현기증이 일었다. 휘청거릴 것 같아서 가볍게 머리를 털며 똑바로 서는데 누군가가 왼쪽 어깨를 톡톡 두드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얼굴이 보여 온다. 안경은 어디다 두고 온 걸까. 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디선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왜 그렇게 있어요?”
“―――.”
“하영?”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내 꼴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느릿하게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는 퍽이나 듣기 좋았다. 이번도 산책인 걸까.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게다가 휴일이도 하고.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뺨을 스치는 것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꽃잎이다. 소매에 걸린 것을 내려 보다가 머리위의 벚꽃을 올려보고, 다시 고개를 낮춰 진영을 쳐다봤다. 그냥 벚꽃이 예뻐서요. 잠깐 멍하니 있었어요. 적당히 둘러대며 시선을 피하는데 그러기도 전에 붙잡는 목소리에 다시 진영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잘 됐네요. 손 줘 봐요.”
“어… 뭐에요?”
“머리핀이에요.”
마이 주머니에서 꺼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린 건 아주 약간 두께가 있고 폭이 좁은, 작은 나뭇잎 여러 개가 촘촘히 이어져 있는 은색 머리핀이었다. 심플하고 예뻐서 와-탄성을 내뱉자 마음에 들어요? 라고 물어온다. 에? 이해가 안가서 고개를 들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진영이다. 예쁘기도 하고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그동안 이러저러 말동무 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에요. 그러면서 내 손에 올려주려는 행동을 보인다. 그걸 가만 보다가 멈칫 손을 거뒀다. 물건을 받을 손이 사라지자 진영도 덩달아 멈췄다. 왜 그래요? 의아한 얼굴을 한 진영을 올려다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어도―꼭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착각일까? 단지 착각이길 바랬다.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른 단어가 조합을 이뤄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하면 안 된다. 말하지 않으면 다시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못 만나요?”
결국은 묻고 말았다. 내 질문에 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말이 꼭 그런 것 같아서요.”
그에 입을 다물더니 난처하다는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어떨 것 같아요? 궁금하단 듯이 묻는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차마 쏘아붙이진 못하겠고 답답한 마음에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자 7살 개구쟁이 어린애처럼 짓궂은 얼굴을 한다.
“응. 맞아요. 한동안 외국에 나가게 됐어요.”
“아…”
역시나인 걸까. 꼭 안 좋은 기분은 들어맞는다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지난번에 학교에 다녀왔던 건 휴학처리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묵묵히 들으면서 그랬군요. 머리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멍했다.
벚꽃은 겨우 일주일 밖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사람들은 화려한 꿈을 꾼다. 그건 백일몽白日夢보다 길고 무척이나 근사한 꿈이다. 어쩌면 진영을 만난 것 역시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토록이나 생생하다. 꿈일 리가 없다. 그런데 저물어버리는 벚꽃처럼 더 이상 진영을 보지 못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형태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아팠다. 이 아픔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벚꽃이 그러하듯 그저 7일의 꿈으로 끝내면, 끝낸다면. 이 순간도, 기억도, 저 미소도… 작은 보물 상자 속에 조심스럽게 담아두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그런 걸까?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있자 진영이 앞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온다. 자, 이거 받아요. 핀을 들고 있는 손을 가볍게 흔든다. 이유도 없이 어찔어찔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손이 떨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톡 하니 손위로 머리핀이 올려졌다. 꽃잎만큼이나 가벼운 무게와 함께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옅게 느껴졌다. 머리핀을 건네받으면서 아주 가볍게 스쳤던 손끝에, 벚꽃이 떨어지듯 마음이 술렁였다.
“있죠, 진영 오빠.”
“네?”
그 때문일까. 가만히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던 머리핀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날씨가 좋으니 산책이라도 하겠냐는 진영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내 목소리에 아주 조금 먼저 앞서나가던 그가 돌아선다. 반듯한 얼굴이 이쪽을 향한다.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이제 와서 고민해봤자 늦었으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진영을 향해 말했다.
“다시 만날 수는, 없어요?”
진영을 만난 뒤 처음으로 “다음”을 물었다. 충분히 물을 수 있을 법한 질문인데 어쩐지 긴장이 돼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 질문에 으음, 얕은 신음을 흘리더니 입가의 미소를 조금 더 짙게 만든다. 그리곤 앞으로 잠깐 다가오더니 앞으로 오른손을 척 내민다. 갸우뚱 하는데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검은색 볼펜을 하나 꺼낸다. 그건 왜…? 이런 와중에도 엉뚱하게 이 남자는 볼펜도 가지고 다니는 구나, 신기해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보고만 있는데 볼펜 역시 앞으로 내민다. 궁금증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금방 진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메일 주소 교환할래요? 부지런하진 않지만 열심히 한번 써볼게요.”
이번에 핸드폰이 고장 나버리는 바람에 딱히 필기해놓을 만한 게 없거든요. 마침 펜이 있으니까 내 손에다가 메일 주소 써줘요. 장난스런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너무 충분해서 지금껏 우울했던 것이 한 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제멋대로 일 수 일까 싶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봄바람에 꽃잎이 둥실 뜨듯 서서히 기분이 떠올랐다. 어느새 웃고 있었나 보다. 진영의 얼굴도 아까보다 밝아졌다. 뭐라고 대답할까 싶었지만, 고민도 하기 전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
“잘 부탁해요.”
내 대답에 진영도 웃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절을 돌도 돌아 벚꽃은 다시 핀다. 그 순간은 어김없이 반드시 돌아온다. 그럼 그때 다시 꿈을 꾸자. 화려하고 애틋했던 7일 꿈을. 이 순간처럼―다시 그와 만날 순간을 고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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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작.
오리지널.
스터디글.